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93

죄가 없는 김덕령을 형살한 뒤 후회하던 선조는 이순신에겐 기회를 줬다. 때마침 국가원로 정탁이 올린 상소가 큰 도움이 됐다. 선조는 이순신의 죄를 면해주고, 백의종군을 명했다. 드디어 4월 1일 순신이 옥문 밖으로 나왔다. 2월 3월 옥에 갇혔으니, 무려 57일 만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에겐 또 다른 슬픔이 다가왔다.


이순신의 국문을 마친 윤근수는 선조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이순신을 아무리 고문하여도 실토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전무죄를 알 수 없습니다.” 영의정 유성룡은 묵묵무언했다. 일부 재신이 “이순신을 참해야 한다”고 간청하자 경림군 김명원이 나섰다. “일본인의 배 타는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가등청정이 일주일 동안 섬에 있겠습니까? 이순신은 가등청정을 돕지 않았습니다.” 김명원의 말을 들은 선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렵, 국가원로 정탁은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伏伏以 李舜臣 罪名甚嚴 聖上不卽加誅 或示可生之道也 凡罪人 一次經訊 或多傷斃 雖有可論之情 已無所及矣 臣竊憫焉 今舜臣 旣經一次刑訊 若又加刑 難保其必生 當壬辰敵艘蔽海 勢若滔天 守土之臣 棄城者多 專閫之將 全師者少 倡率舟師 連挫兇鋒 國內人心 稍有生意 倡義者增氣 附敵者回心 厥功鉅萬 至加崇秩 賜以統制之任 手下才勇 咸樂爲用 夫將臣者 軍民之司命 國家安危之所繫 故古之帝王 別示恩信 以盡其用 雖一藝之士 皆曲護而全安之 以示人主愛惜人才之意 況將臣之有才如者乎 才兼水陸 無或不可 如此之人 未易可得 邊民之所屬望 敵國之所畏憚 若不念功罪之相準 而終致大辟 有功者無以勸 有能者無以勵 而徒爲敵國之幸也 一舜臣之死 固不足惜 於國家所關非輕 豈不重可爲之慮乎 伏乞特減刑訊 使之立功自效則 其感戴聖恩 當隕首圖報矣 我聖主 中興圖閣之勳臣 安知不起於今日之罪人乎

▲ 충효를 모두 잃은 이순신을 주변인은 측은하게 여겼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엎드려 아룁니다. 이순신은 죄명이 심히 엄하나 성상께서 즉시 벌하지 아니하심은 혹 그를 살릴 수 있는 길을 보이신 것입니다. 무릇 죄인이 심문을 거친 후 목숨이 끊어지면 어찌할 길이 없으므로 신은 안타깝게 여겨왔습니다. 이제 순신은 형벌을 겪었는데 만약 또 형벌을 가하면 산다고 보장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임진년에 왜적의 배가 바다를 덮어 세력이 하늘까지 치솟았을 때 성城을 버린 신하가 많습니다. 이런 와중에 수군은 적의 예봉을 꺾음으로써 민심의 동요를 막고 생기를 얻게 했습니다.

의병을 일으킨 자들은 기운을 돋우고 적에게 붙었던 자들도 마음을 돌렸습니다. 이순신의 공로야말로 참으로 컸으므로 벼슬을 더해주고 통제사의 소임을 내렸습니다. 하물며 순신과 같은 장수의 재질을 가진 자는 수륙전의 재주를 모두 겸비해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런 인물은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변방 백성들이 바라는 자요, 왜적들이 무서워하는 자입니다.

만일 공과 죄를 견주어 보지도 않고 끝내 큰 벌을 내린다면 공이 있는 자는 권하지 않을 것이요 능력이 있는 자는 애쓰지 않을 것이니 도리어 적국에 다행스러운 일이 되고 말 겁니다. 한 사람 순신의 죽음은 아깝지 않으나 나라에 관련돼 있는 것들이 가볍지 아니하니 어찌 중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순신이 만약 두 마음을 품고 있다면 신의 권속 40여인 들어 보증하겠습니다.”

나랏일이야 어찌 됐든 나만 만족하면 그만이라는 무리들, 당색의 비위만 맞추어 내 벼슬길이나 올라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무리들, 내 공을 드러내기 위해 모함하는 무리들, 이순신 같은 충량지신을 참해하려는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승정원의 무리들, 외모는 당당하나 내정은 부패된 무리들은 정탁의 상소에 맞서지 못했다.

그 무렵, 선조는 무죄한 김덕령을 형살한 뒤 후회하던 때였다. 더구나 이순신의 공을 돌이켜 생각하고 있던 터라, 정탁의 상소를 보고 크게 기뻐했다. 그리곤 이순신의 죄를 면해주고, 백의종군을 명하였다. 4월 1일에 순신이 옥문 밖으로 나왔다. 2월 3일 입옥한 후 4월 1일 출옥하니 그 기간이 57일에 달했다.

옥문을 나온 이순신은 남대문 밖 여차旅次로 나왔다. 판서 윤자신尹自新, 비변사 낭청郎廳 이순지李純智가 사처까지 찾아와 위문하였다. 영의정 유성룡, 판부사 정탁, 도승지 심희수, 경림군 김명원, 대사헌 노직, 병조참판 이정형, 병사 곽영의 무리와 대신, 대관도 위문 서간을 보냈다.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이 있는 초계로 가는 길에 고향인 아산에 들러 분묘와 사당에 배알하였다. 그때 이순신의 어머니 변씨는 전라도 순천부 고음천리古音川里 정씨가丁氏家에 있었다.

이순신은 한산도에 있는 동안 어머니를 순천에 모시고, 종종 근친하였다. 더 가까운 곳에 모시지 않은 건 부모 처자식을 멀리 둔 다른 제장들을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변씨는 이순신이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들은 후 노병老病이 심해져 4월 11일에 83세의 노령으로 별세하였다. 이순신이 옥에서 나온 뒤 10여일 만에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순신을 반갑게 맞은 백성들

16일 어머니의 영구는 아우 우신禹臣과 조카들이 모시고 뱃길로 아산 본댁에 돌아와 빈소를 차렸다. 주상은 장조카 전 찰방察訪 뢰蕾가 승중상(아버지를 여읜 아들이 치르는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초상)으로 하고, 호상(초상 때 상례에 관한 일을 주관하는 사람)은 오종수吳從壽요 제복製服은 전경복全慶福이 맡았다.

금부관원은 이순신에게 17일부터 길을 떠나기를 재촉했지만 19일에야 모친의 영전에 곡하고 애통해 했다.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였으나 죄가 있었고,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자 하였지만 돌아가셨으니 천지간에 나와 같은 일이 있으랴.”

이순신은 4월 27일 도원수 권율이 있는 순천부에 당도했다. 이전 부하였던 장사들이 구름 모이듯 모여들어 이순신을 반갑게 여겨 조문하였다. 권율도 군관을 보내어 “상중에 멀리 와서 몸이 피곤할 터이니 원기가 회복되거든 일을 보라”고 인사를 전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을 두려워한 권율은 그를 미워하며 멀리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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