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류 학자의 참회록

최운열 교수는 평생 주류의 길을 걸은 명망 높은 학자다. 그가 학생들 앞에서 참회의 고백을 했다. 지난해 여름 정년 퇴임에 즈음한 고별 강연에서다. 그는 낙수효과는 사라졌고 지금의 우리나라 경제구조는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진단했다. 젊은 세대가 겪는 고통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퇴직금의 일부를 출연해 제자들과 장학금도 만들었다.

▲ 최 교수가 지난해 6월 정년퇴임을 앞두고 서강대 경영대 바오로관에서 고별강연을 하고 있다.[사진=서강대 제공]

최운열 교수는 지난해 8월 서강대에서 정년퇴임했다. 그는 학교가 제안한 퇴임식 대신 학생들을 상대로 고별강연을 했다. 제목이 ‘주류학자의 참회록’이었다. 효율을 중시하는 경영학자로서 성장 재원을 대기업에 집중 투입해 투자의 효율을 높여야 한다는 대기업 위주의 성장 논리를 과거 오랫동안 개발하고 전파했다고 이날 그는 고백했다.

“성장 재원을 분산 투자하면 그 효과가 더디게 나타나기 때문이죠. 1990년대 말까지는 이 논리가 유효했습니다. 국내총생산(GDP)이 7% 성장하면 가계 소득과 기업 소득, 정부 수입이 다 그만큼 늘어났어요. 그런데 2000년대 들어선 후 이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 공식이 안 들어맞기 시작했어요. 2012년부터는 GDP가 3% 성장하면 가계 소득은 1%, 기업소득은 7~8% 늘었죠. 성장의 과실이 대부분 기업으로, 그것도 몇몇 대기업의 곳간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들 거대기업이 일자리라도 만들어 내면 좋은데 제조업 특성상 이들은 고용 없는 성장을 하고 있어요.”

그는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젊은이들이 취업이 안 돼 고통을 겪는 것에 대해 책임을 느낀다고 말했다. 철이 지나도록 낙수효과에 의한 성장 논리를 편 것에 대해 참회한다고 털어놓았다.“법인세를 낮추라고 주장하고, 금리가 이슈가 되면 가능한 한 기업에 유리하도록 금리를 내리라고 신문 칼럼 등을 통해 발언했습니다.”

✚ 지금 한국 경제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뭐라고 보나요? 
“회복하기 힘들 만큼 불균형 성장을 한 겁니다. 소득의 양극화, 비정규직 양산, 청년 일자리 부족 문제 등이 그 양상이죠. 2007년~2012년 5년간 우리나라 GDP가 10% 늘어났는데 대기업의 이익은 2011년 한해 동안 60% 증가했습니다. 2013년 전체 상장기업이 올린 순이익의 51%를 삼성전자가 ‘나 홀로’ 달성했어요. 소득 상위자 10%가 차지하는 소득 비중이 48%, 하위 50%의 소득 비중은 5%에 불과한 반면 10대 재벌 계열사의 자산총액은 지난 10년 간 3배로, 계열사 수는 2배로 늘었어요. 능력과 무관한 2ㆍ3세로의 재벌 경영권 이전도 논란거리죠. 이게 최근 경제민주화가 다시 화두로 떠오른 배경입니다.

✚ 이같은 불균형 성장의 원인을 어떻게 진단하나요? 
“이른바 압축성장을 기하느라 대기업 위주의 성장 정책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법인세 인하,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중소기업 적합업종 폐지 논의가 이뤄졌는데 이때 주류 학자로서 저는 대기업 편을 들었어요. SSM(기업형 슈퍼마켓)과 재래시장 간 갈등도 같은 맥락이죠.” 그는 대주주 중심의 경영권 세습에 대해 정부에 비유하면 국민 뜻과 무관하게 특정 계층 안에서 권력이 이양되는 권위주의 정부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 경제민주화가 뭐라고 보나요? 어떻게 해야 실현할 수 있나요? 
“공정한 시장경제를 만드는 것이죠. 소수가 특권적 지위를 누리면서 시장을 독점하거나 좌지우지하는 게 아니라 이 나라 국민 누구나 경제 주체로서 공정한 기회를 보장받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경제가 정상화돼야 합니다. 한국사회가 안정을 찾고 나아가 지속가능한 성장을 하려면 재벌과 노동, 세제를 개혁하고 정치도 바뀌어야 합니다. 더 늦기 전에 국민이 주인답게 사는 나라, 그런 경제구조를 만들어야 돼요. 그래서 기회가 평등하게 보장되는 사회로 나아가지 않으면 스티글리츠 교수 말대로 지나친 불평등이 시장경제의 역동성을 마비시키고 효율성과 무관한 분배구조를 고착시켜 결국 우리 사회가 침몰할 수도 있습니다. ‘결과가 불평등하면 기회의 평등도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부유층 세금을 늘리고 저소득층을 지원하는 재원을 마련하라고 권고하면서 이렇게 선언했어요.”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OECD 27개 회원국 중 네 번째로 정치ㆍ사회적 갈등이 심한 나라이다. 이 연구소는 높은 갈등 수준으로 인해 우리가 1인당 GDP의 27%를 지불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 우선 재벌 개혁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배구조를 바꾸고 순환출자를 해소해야 합니다. MRO(원자재를 제외한 소모성 자재) 구매, 물류, IT, 광고 등을 통한 일감 몰아주기도 중단해야 돼요. 하도급법 위반 즉 협력업체에 대한 이른바 갑질도 여기서 멈춰야 합니다. 단적으로 부당 단가인하, 부당 발주, 부당 반품 행위 등이죠.”

리디노미네이션과 국민개세주의 필요

✚ 이 정부도 노동개혁을 벼르는데, 노동개혁의 방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요? 
“우선 임금구조를 고쳐야 합니다. 동일노동에 동일 임금을 지급해 비정규직의 인건비를 더 올려야 합니다. 근로시간은 단축하고, 정년 연장과 임금피크제를 동시에 처리했어야 돼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차별이 극심한 노조도 민주화돼야 합니다.”

10년 전부터 이 문제에 천착했다는 그는 요즘은 이런 주제로만 강의를 한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여러 사람이 저더러 변했다고 하더군요. 이념 공세를 당할 때도 있어요.” 한국 사회에서 주류의 길을 걸어온 그로서는 그런 시선을 받을 만도 하다.

✚ 세제는 어떻게 고쳐야 하나요? 
“우선 실효세율이 16%에 불과한 법인세를 올려야 합니다. 10대 기업의 실효세율은 12.3%예요. 또 OECD 평균(GDP의 10%)의 두 배가 넘는 지하경제(22%로 추정ㆍ2013년 LG경제연구원 추정치 314조원)를 양성화해야 합니다.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ㆍ화폐 단위 변경)도 해야 합니다. OECD 국가 중 자국 화폐가 1달러 대 1000 단위 이상인 나라가 없어요. 커피숍에 가면 커피값을 5.0 식으로 표시합니다. 우리도 국격에 맞게 화폐단위를 1달러 대 1원 또는 10원으로 변경해야 합니다. 이 조치는 지하경제양성화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또 국민개세주의를 채택해야 합니다. 소득이 있으면 단돈 1원이라도 세금을 매겨야 돼요.”

최 교수는 정년퇴임하면서 장학금을 만들었다. 최운열교수장학금. 그가 몸담았던 서강대 경영대 학부생이 지원 대상으로 이번 학기부터 지급한다. 당초 제자들이 찾아와 헌정 논문집을 만들겠다고 했다. 그가 “논문 쓰는 후배 교수들이 힘들어 하고 학자들이 잘 읽지도 않는 논문집 대신 그 비용을 장학금으로 출연하면 같은 금액을 매칭펀드로 내놓겠다”고 제안했다. 그래서 7000만원이 마련됐다.

이 소식을 접한 그의 멘토가 3000만원을 보탰다. 한 독지가는 전화를 걸어와 500만원을 선뜻 내놓았다. 여기에 경영대 학부를 나와 사회에 진출한 제자들 93명이 월 1만원씩 얹기로 했다. 장학생 선발은 학부와 대학원에서 각각 두 명의 학생이 맡기로 했다.

그는 지도교수를 맡았던 학부 제자들과 일년에 두 차례 만난다. 졸업생도 온다. “취업한 선배들이 참석해 들려주는 생생한 이야기가 취업 문제로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내 얘기보다 훨씬 도움이 돼요. 학생들한테도 내가 너희들에게서 배운다고 말합니다.”
이필재 더스쿠프 대기자 stolee@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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