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유가 지나치면…

▲ 저유가 기조가 예상보다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다는 우려가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다.[사진=뉴시스]
석유가 곧 부富인 시대는 지났다. 올해 들어 유가 하락세가 가팔라지면서 ‘검은 황금’으로 칭송받던 원유가 ‘검은 눈물’이 됐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저유가 국면이 생각보다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저유가가 아무리 민생에 도움을 준다지만, 이 역시 지나치면 ‘독毒’이 될 수 있다.

“기름이 물보다 싸다.” 신新저유가시대가 도래했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지난 10일 기준 두바이유 가격은 전 거래일보다 3.02달러 하락한 배럴당 26.20달러로 집계됐다. 두바이유는 최근 배럴당 20달러 수준에 머물고 있다. 1월 21일 기록한 배럴당 22.83달러는 2003년 4월 30일(22.80달러) 이후 12년 9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미국 텍사스산 원유(WTI)의 3월 가격은 전날보다 49센트(1.8%) 떨어진 배럴당 27.45달러였다. WTI는 5거래일 연속 하락하며 1월 20일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원유를 전량 수입해야 하는 국가에 저유가 기조는 득得이다. 특히 서민 경제에는 반가운 일이다. 이미 대한민국 국적기를 이용하는 여행객은 유류할증료를 내지 않는다. 국제선 항공권과 국내선 항공권의 2월 유류할증료가 모두 ‘0원’으로 책정됐기 때문이다.

기름값도 싸졌다. 지난 11일 기준 전국 평균 휘발유값은 L당 0.86원 내린 1357.2원 수준이다. 2009년 1월 22일 이후 약 7년 만의 1300원대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우리 삶과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휘발유와 경유 등 석유제품은 물론 원유를 기본으로 한 다양한 석유화학 제품들이 일상생활에 녹아들어 있어서다. 유가가 내려가면 장바구니 물가도 내려갈 공산이 크다.

문제는 저유가의 지속 기간이다. 저유가 기조가 장기화되면 도리어 민생에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과거 유가 하락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경제에 축복이었다. 주요 기업들의 에너지 비용과 생산 원가가 감소됐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의 호황을 경험한 우리나라 경제도 여기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번 저유가는 다르다. 전문가들은 이번 저유가가 세계 경제를 짓누르고 있는 디플레이션을 악화시킬 것으로 보고 있다. 2016년 연초 세계 증시를 무너뜨린 주범으로 저유가를 지목하는 전문가도 많다. 유가 급락이 글로벌 경제의 불안과 결합했기 때문이다. 산유국들은 말할 것도 없고, 원자재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신흥국 경제에도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세계 경제가 좋지 않고 국내 경기마저 살아나지 않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생산원가가 줄어도 수출과 소비가 늘어날 리 없다. 그보다 당장 저유가로 인한 타격을 입을 몇몇 산업이 등장했다. 산유국이나 신흥국의 수주가 줄어드는 건설이나 조선업, 석유화학, 정유 산업 등이다.

일단 올해까지는 저유가 기조가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에는 이견이 없다. 골드만삭스는 WTI가 올해 상반기에 40달러를 유지할 것으로 관측했다. 영국 버클레이 은행은 올해 평균 37달러대를 기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저유가 지속 언제까지…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은 단기유가전망보고서를 통해 북해산 브렌트유가 올해 평균 40달러, 내년 50달러대를 나타낼 것으로 내다봤다. WTI는 이보다 각각 2달러, 3달러 낮은 가격대를 예측했다. 다만 이후의 분석은 엇갈린다. 올해를 기점으로 유가가 다시 반등한다는 주장과 지금과 같은 약세가 장기화될 수 있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어떤 주장에 더 힘이 실리고 있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유가 반등의 조건을 살펴봐야 한다. 표면적으로는 두가지다. 공급이 줄어들든가, 수요가 늘든가다. 공급이 줄어들 가능성을 보자. 일단 당장은 어려울 전망이다. 지난해 12월 열린 석유수출국기구(OPEC) 총회 때문이다. OPEC 회원국의 총 생산량(2015년 11월 기준 하루 3169만5000배럴)이 이미 기존 상한선(하루 3000만 배럴)을 넘었지만 감산은커녕 새로운 생산목표치조차 정하지 못한 채 회의가 끝났다. 결국 우려대로 지난 1월 이란의 산유량이 하루 8만 배럴이 늘어나면서 OPEC 회원국의 1월 산유량은 28만 배럴 증가했다.

이번 유가 급락의 기폭제가 된 ‘셰일혁명’의 주인공인 미국 역시 감산할 생각이 없다. 낮은 채산성으로 미국 에너지기업들이 줄줄이 파산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EIA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미국에서 생산된 원유량은 하루 평균 935만 배럴. 2014년 같은 기간 하루 평균 913만 배럴에 비해 오히려 증가했다.

이들은 기술 혁신을 통해 시추 하나당 생산량을 늘리고 장비 가격 등 운영경비를 줄여 원유생산 효율성을 개선해왔다. 기술력이 유가폭락에도 생산량을 오히려 늘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된 셈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급감하는 원유 가격에 끝없이 맞설 수 없다. 결국 유가 반등의 열쇠는 ‘미국 원유 생산의 손익분기점’에 달려 있다. 저유가가 계속 유지될 경우 미국 에너지기업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생산단가가 높은 셰일가스 채굴량을 줄일 공산이 크다. 5억 배럴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미국의 원유 재고도 이들에게는 큰 부담이다.

하지만 미국 셰일가스 생산의 가격 한계점이 언제 올 것인지에 대한 예측은 엇갈린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미 북부의 경우 국제유가가 배럴당 42달러까지 떨어져도 이익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감산이 어렵다면 수요가 증가해야 하는데 이마저도 쉽지 않다. 세계 최대 석유수입국인 중국의 경제 상황이 밝지 않아서다.

반등 원동력이 없다

결국 공급을 줄이지도, 수요를 늘리지도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유가는 계속 하락하고 있다. 그나마 기댈 수 있는 부분은 올해 1분기가 유가 저점이 될 것이란 전망이다. 그러나 유가 급락세가 반복되고 좀처럼 바닥을 찾지 못하면서 유가 하락세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1990년대 장기 저유가 국면 진입’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글로벌 경기 사이클이 저성장에 빠져 있고 미국의 금리인상과 달러가 강세를 보이는 것도 당시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과거와 같은 긴 저유가 국면에 돌입하면 우리나라 민생에 좋을 것이 없다”며 “유가 등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이어져 글로벌 경제의 디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질 수 있고, 국내 경기 회복 시점도 지연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민생을 괴롭게 할 저유가 유통기한이 생각보다 길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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