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관상 ❺

▲ 김내경은 한명회의 관상을 봐주면서 목이 잘릴 팔자라고 말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수양대군(이정재)은 “운명아 물러서라. 내가 간다”고 외쳤다는 니체(Nietzsche)처럼 운명을 비웃고 자신의 불같은 의지로 왕권을 거머쥔다. 그러나 수양 역시 운명론을 완전히 폐기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왕위에 오른 수양은 자신의 최고 책사 한명회(김의성)를 바닷가 땅끝 마을로 돌아간 김내경(송강호)에게 파견한다. 계유정란 당시 수양의 진영에 있던 이들 가운데 ‘역적’의 상을 골라 정리해 줄 것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역모의 ‘찝찝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관상’에 매달린 셈이다.

목숨보다 소중했던 외아들을 잃고 관상의 허망함을 깨달은 김내경은 초점 없는 눈빛으로 혼잣말하듯 이렇게 말한다. “그날 당신들 얼굴에 뭐 별난 거라도 있었던 줄 아시오? 사기꾼의 상도 있었고, 백정의 상, 글 읽는 선비의 상….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상이었소. 수양은 그냥 왕이 될 사람이었을 뿐이었단 말이오. 난 사람의 얼굴을 봤을 뿐 시대를 보지 못했소.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본 격이지. 바람을 봐야 하는데. 파도를 움직이는 건 바람인데 말이오. 당신들은 높은 파도를 탔을 뿐이오. 우린 그저 낮게 쓸려가는 중이었소만.”

당대 최고의 ‘잘 돌아가는 머리’였던 한명회도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려워 눈만 껌뻑인다. 김내경은 일생의 마지막이 될 한명회의 관상을 봐준다. “참으로 묘한 상이오. 천박한 듯하면서도 고귀하고…. 그런데 끝이 좋지 않소. 당신 목이 잘릴 팔자요.”

바람 부는 바다 절벽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은 선문답 같은 대화는 무슨 의미였을까. 김내경은 ‘혼돈이론(Chaos theory)’의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를 말한다. 산둥山東반도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일으키는 잔잔한 바람들이 미국 텍사스의 거대한 토네이도를 일으키는 건 분명하지만 그 과정은 알 길이 없다. 마찬가지로 하찮은 사기꾼, 백정, 선비 나부랭이들이 모여 천하를 바꾼 건 분명하다. 하지만 왜,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거대한 세력이 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똑같은 인물들이 다시 모인다고 해서 다시 천하를 흔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토네이도는 일어났고 수양은 왕이 됐을 뿐이다. 김내경이 보기엔 계유정란의 설계자 한명회도 하찮은 ‘산둥반도의 나비 한 마리’에 불과하다.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 성글어 보여도 빠져나가지 못한다天網恢恢疎而不失”면서 ‘하늘의 섭리’를 설파한다. 한명회는 ‘하늘의 섭리가 성근’ 덕에 4명의 왕을 모시며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하늘의 그물을 영원히 피할 수는 없었다. 사후死後 17년이 지나 관속에서 꺼내져 목이 잘려서다. 노자와 김내경이 예언한 대로다.

▲ 천재 관상가 김내경도 결국 세상을 다 알 수는 없다는 걸 깨닫는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영화 ‘관상’의 마지막 장면에서 송강호가 내공 있는 표정 연기로 영화를 총정리한다. 바다절벽에 서서 바람에 의해 끊임없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파도를 바라보는 김내경의 표정은 실로 복잡하다. 슬픔과 회한의 복잡한 표정 속에 문득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격이 스친다. ‘유레카(알았다)’를 외친 아르키메데스의 표정이 그랬을까.

연홍(김혜수)이 다가와 김내경에게 묻는다. “무얼 그리 보고 있소?” 김내경은 허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대답한다. “세상을 보고 있소.” 연홍이 다시 묻는다. “세상이 어떻소?” 김내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천재 관상가 김내경이 얻은 궁극의 깨달음은 의지론이나 운명론이 아닌 ‘혼돈이론’과 ‘불확정이론’이 어우러진 ‘불가지론不可知論’이었던 듯싶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지력으로 감히 무한한 세상을 알 수 있겠느냐는 거다. 김내경의 말처럼 “(인간은) 바람은 못 보고 바람이 만들어내는 파도만 볼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opo.ac.kr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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