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제 유토피아」

많은 이는 ‘시장’을 곧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과연 자유로운가. 데이비드 그레이버 런던정경대(LSE) 교수는 ‘아니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지금이 “프랑스 절대왕정 시절보다 1000배 많은 서류작업이 필요해졌다”고 꼬집는다. 이유는 자본주의와 관료제의 음흉한 결탁에 있다.

시작은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자는 “정부의 역할을 줄이도록 고안된 자유방임 경제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장=자유’라는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자유주의가 강화될수록 관료제가 약해질 줄 알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둘은 정비례했다.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각종 규제와 관료가 늘어났다. 그리고 지금, 정부의 업무체계는 말할 것도 없고 기업·학교를 비롯해 사회 곳곳에 관료주의가 퍼져 있다. 신자유주의에서 ‘자유’라는 단어 자체가 모순이 돼버린 거다. 당신이 회사에서 작업해야 할 서류가 계속 늘어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저자는 권위에 날선 비판을 서슴지 않는 지식인이자 사회운동가다. 2011년 9월 “우리는 99%”라는 독창적 구호를 만들어 ‘월가점령운동(Occupy Wall Street)’을 이끌기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현대 자본주의와 관료제 사이의 끈끈한 밀월관계와 이로 인해 파생된 다양한 문제를 낱낱이 파헤친다. 우리가 불만을 늘어놓으면서도 관료주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 책의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규제완화’의 실체를 보여줬다는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규제완화는 의사결정권자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방식’으로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그 결과, 거대 자본의 완벽한 지배를 받는 지금의 사회구도가 만들어졌다.

저자는 카프카의 소설 「심판」, 영화 ‘배트맨’ 등을 인용하며 자신의 주장을 흥미롭게 풀어낸다. 1장에서는 관료주의를 움직이고 유지하는 힘의 원천이 ‘구조화된 폭력’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말하는 폭력은 공권력이다.

2장에서는 한때 우리를 설레게 했던 미래의 청사진(순간이동 장치·불로장생약 등)이 왜 구현되지 못했는지를 날카롭게 분석한다. 원인은 관료제가 상상력을 외면한 탓이었다. 관료제가 어떤 분야를 선택해 자본을 집중하고 있는지, 그렇게 발달한 과학기술이 우리 삶을 어떻게 구속하고 있는지도 차근차근 설명해 준다.

3장에서는 관료주의에 종속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를 지적한다. 나아가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상상해 볼 것을 권유한다. 관료주의를 넘어선 더 나은 세상의 도래가 가능할지 그레이버 교수의 조언에 귀기울여 보는 건 어떨까.    
노미정 더스쿠프기자 noet85@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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