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국제시장 ❹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은 분명 덕수(황정민)와 영자(김윤진)다. 하지만 영화의 의미를 관통하는 주인공은 어쩌면 영화의 시작과 끝에 잠깐 등장하는 ‘막순이’일지도 모르겠다. 예닐곱살의 막순이는 1953년 12월 오빠 덕수의 등에 매달려 피난선에 오르다 오빠를 놓친다. 그로부터 정확히 30년 뒤 1983년 KBS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통해 미국 LA에 거주하는 한국말 모르는 아줌마로 다시 등장한다.

심리학자들이 분석하는 우리의 ‘기억’은 3단계로 구성된다. 우리는 경험한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때로는 기억하지 않을 때도 있다. ‘기억’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경험이 ‘코드화(encoding)’돼야 한다. 경험한 정보를 기억하고 명심해야 한다고 느껴야 한다. 그렇게 코드화된 기억이라야 비로소 뇌에 ‘저장(storage)’된다. 그 과정에서 경험과 정보는 저장하기 쉽게 조정되거나 단순화된다.

저장된 정보가 ‘재생(retrieval)’될 때 비로소 기억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 정보가 항상 재생되는 건 아니다. ‘문득문득 생각나는(free recall)’ 경우도 있고, 어떤 ‘계기를 통해(cued recall)’ 저장된 정보를 꺼내보기도 하며, 다른 일과 ‘연관 지어(serial recall)’ 떠올리기도 한다. 저장만 된 채 영원히 재생되지 않는 정보도 많다.

영화에서 덕수 일가는 피난통에 막순이를 잃어버렸지만, 30년간 막순이를 그다지 기억하지 않는다. 물론 ‘문득문득 생각’날 때도 있었을 것이고, 흥남철수 때를 생각하다 막순이를 떠올렸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거의 잊고 살아간다. 덕수네 일가에게 ‘막순이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어떻게 ‘코드화’되고, ‘저장’돼 있었기에 30년간 절실하게 ‘재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을까.

어쩌면 ‘일가족의 삶과 죽음’이라는 절체절명의 피난 기억 속에 막순이라는 존재는 가장 중요한 정보로 ‘코드화’되거나 ‘저장’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후 30년간 막순이를 기억할 만큼 한가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잔인하지만 굳이 막순이를 기억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던 1983년 여름 난데없이 ‘KBS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이라는 ‘계기(cue)’가 제공된다. 덕수네 일가처럼 잃어버린 가족을 거의 잊고 살아가던 모든 이산가족이 그제야 잃어버린 가족을 기억한다. 그리고 헤어진 가족을 찾지 못하면 죽어버릴 것 같은 고통 속에 몸부림친다. 1953년 흥남부두가 1983년 서울 여의도에서 재연된다. 덕수네도 30년 만에 떠오른 막순이 생각에 일상이 무너지고 비탄과 애절함에 빠져든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정보를 머릿속에 어떻게 저장하고, 그 정보를 어떤 경우에 다시 불러내는가. 우리가 저마다 믿어 의심치 않는 기억이라는 건 이처럼 정교하게 작동하는 듯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대단히 편의적이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위험한 장치이기도 하다.
 
이처럼 한 개인의 기억이라는 것도 의심스러운데 ‘집단기억(collective memory)’의 모호성과 위험성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영화 ‘국제시장’이 보여준 ‘집단기억’은 우리 현대사의 ‘생존기반 조성’만 있을 뿐 그 과정에서 겪었던 부작용이나 민주화의 ‘집단기억’은 재생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집단기억은 개인기억과는 달리 집단구성원끼리 조화를 이뤄 경험을 코드화하고 저장하고 재생하려는 속성을 지닌다. 또한 그것이 문화권력이든, 정치사회권력이든, 국가권력이든 ‘집단권력’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집단기억’은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된다.

지금 우리는 과거의 역사적 경험 가운데 무엇을 ‘기억의 창고’에서 꺼내 봐야 할 것인가.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경험과 정보들을 어떻게 코드화하고 어떻게 정리해서 저장해야 할 것인가. 영화 ‘국제시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또 다른 질문이다.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opo.ac.kr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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