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105

이순신은 군무에 노고하는 군사들을 위안하기 위하여 크게 호궤’饋(군사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함)하였다. 하지만 수군의 사정이 말이 아니다. 바닷바  람은 차가워지는데, 아직도 여름옷을 입고 있다. 병선도 불과 13척뿐이다. 이순신의 근심은 날이 갈수록 깊어갔다.

 
남원성을 지키던 ‘조방장’ 김경로는 “성문을 열라”는 명나라 장수 양원의 말을 듣지 않았다. 양원은 마지못해 전라병사 이복남을 불러 문 열기를 명하였다. 양원의 말을 거역한 김경로의 죄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한 이복남은 문을 열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양원 등 명나라 군사들은 앞다퉈 북문으로 달아났다.

김경로는 북문을 닫아 걸고 이복남을 앞세워 싸우길 재촉하였다. 김경로의 충의에 감동한 전라병사 이복남은 군사들에게 전력으로 수성하기를 격려하였다. 군사들도 죽기로 결심하고 함성을 지르고 남문을 향하여 돌격하였다.
 
하지만 모리수원 등 일본 5만 대군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전군이 전멸을 당하고 김경로를 비롯해 병사 이복남, 별장 신호, 현감 이춘원은 전사하였다. 이날 싸움에서 조선 군인으로 살아남은 이는 남문을 지키던 군관 김효의金孝義 한사람뿐이었다. 그는 물 있는 논에 죽은 사람같이 자빠져 있다가 적군이 없는 틈을 타서 전주로 달아났고, 이날 싸움의 진상과 결과를 상세하게 보고했다.

그렇다면 남원성 북문으로 도망을 친 양원 등 명군은 어떻게 됐을까. 그들은 도망을 치던 중에 가등청정의 군대를 만나 거의 몰살을 당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양원은 살아남은 군사 17명을 데리고 전주로 도망쳤다. 그는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 군사를 잃었다”고 거짓 보고를 했지만 김효의 덕분에 그 거짓말이 탄로났다.

▲ 전국 8도에서 피난민이 이순신 장군의 날개 밑으로 몰려들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양원의 도주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양원은 3000 병마를 몰고 북문으로 빠져나와 도망을 치고 있었다. 그때 미리 매복해 있던 가등청정의 군사가 명군을 습격하였다. 일본군의 검술에 겁을 먹은 명나라 군사들은 칼을 피하느라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칼에 맞아 죽었다. 이 모양으로 3000여 명병은 항거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전멸이 되다시피했다. 어떤 명병은 조선 민가에서 강탈한 보물을 몸에 지녔다가 일본군사 앞에 내어 놓고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받들면서 살려달라고 빌었다.

남원성, 일본 5만 대군에 점령

총병 양원도 죽기를 면하기 위하여 칼, 부절符節, 마제은馬蹄銀 등을 두손으로 받들어 일본 병졸에게 올리며 “나는 양총병, 나는 양총병”이라며 살려 주기를 애걸했다.

일본 군사들 중 혹자는 “이 명나라 장수를 생포하여 일본의 무위를 빛내자”고 하였지만 그중에 두목 되는 사람은 의견이 달랐다. “저 놈은 장수이지만 자격이 없는 놈이니 살려 보내어 저의 나라 천하에 우리 일본 군인이 어떻게 무서운지를 알리게 하자.”

그리고는 발길로 양원의 등덜미를 차서 쫓아 버렸다. 이렇게 목숨을 굴욕적으로 보존한 양원이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가 거짓말을 했다가 딱 걸린 거였다. 이후 양원은 북경에서 사형을 당했고, 그 수급은 조선으로 돌려보내졌다.

그 무렵 일본군은 경상도 전부를 횡행하여 중요한 성읍은 거의 다 점령한 상태였다. 그 뒤에 전라도로 넘어가 남원성을 함락했다. 명나라 장수 진우충은 남원성을 구하려고 부하 병마를 거느리고 오다가 도진의홍, 가등가명 등 일본군 복병 5000기를 만나 패퇴했다.

진우충은 패잔군을 이끌고 전주성에 돌아와 조선 민병을 마구 죽이는 등 화풀이를 했다. 그러자 조선의 선비와 백성들은 성문을 열고 창고에 불 지르고 달아나버렸다. 그러자 진우충도 성 뒤의 샛길로 도망을 쳤다. 일본군이 전주성에 무혈입성을 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 뒤 일본군은 동복ㆍ광주ㆍ나주ㆍ능성ㆍ익산益山ㆍ김제ㆍ고부古阜ㆍ금구金溝ㆍ정읍까지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점령하였다. 또 부전수가의 대군은 한산도로부터 남해ㆍ곤양ㆍ하동을 거쳐 구례ㆍ광양ㆍ순천ㆍ보성ㆍ낙안ㆍ장흥까지 횡행했다.

원래 일본군이 임진란 초에 충청도의 서해, 전라도를 손에 넣지 못한 건 이순신의 수군이 방어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이순신이 보유한 병선은 13척뿐이었다. 수군은 2000명 내외에 불과했다. 일본군이 이순신이 버티고 있는 전라도로 진격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순신 수군도 업신여긴 일본군

그해 9월 9일, 이순신은 집을 떠나 국사에 헌신하여 군무에 노고하는 군사들을 위안하기 위하여 크게 호궤’饋(군사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함)하였다. 바닷바람은 점점 차가워온다. 수군들은 아직도 여름옷을 입고 있다. 겹옷을 어디서 구해 내느냐가 이순신의 근심이었다. 그런데 전라ㆍ충청ㆍ경상 삼도에서 피난한 백성들이 배를 구하여 타고 이순신 장군의 날개 밑으로 모여들었다. 피난선은 날마다 늘어 500~600척에 달하였다.

군사들의 겹옷이 없어 근심하던 이순신은 피난민 중 대표자가 될 만한 백성 10여명을 청하여 차와 술로 대접한 뒤에 이렇게 말했다. “적군이 이제 석권지세席捲之勢로 온다니 백성들의 피난선은 여기 있을 수 있소?” 백성들은 “소인들은 대감만 믿고 왔소”라면서 성심으로 실토를 하였다. 순신은 말의 단초를 얻어 “수천명 병졸 중에 겹옷 없는 사람이 반수 이상이고 군량도 부족하니 겨울은 다가오고 날씨는 점점 차가운데 이러다 모두 죽을 지경이니 어찌 적을 무찌르고 보국안민하기를 바라겠소?”라며 탄식하였다. 이순신조차 마땅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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