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인터뷰 | 한 건설 전문가의 작심 발언

▲ 발주자가 책정한 임금이 현장 노동자에게 깎이지 않고 전달되는 게 낙수효과다.[사진=뉴시스]
건설업계에서 저가경쟁이 판을 치는 이유를 아는가. 공사금액을 손쉽게 깎을 수 있어서다. 그럼 어디서 깎을까. 바로 임금이다. 건설일용직 노동시장이 갈수록 열악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건설 노동자의 적정임금제를 시행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할까.                                                   
더스쿠프(The SCOOP)가 이 문제를 꼬집을 만한 건설 전문가를 만났다. 그는 "건설일용직 노동시장의 문제를 공식적으로 언급할 위치가 아니다" 면서 자신의 이름을 이니셜로 처리해줄 것을 요청했다.

✚건설 노동현장이 갈수록 열악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제 살 깎아먹기식 저가수주 경쟁 때문이다. 공사를 저가로 따낸 건설사는 인건비를 줄여 공사비를 맞춘다. 결국 저가노동력(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이 저가수주 경쟁으로 이어진 셈이다.”

✚ 저가수주 경쟁의 문제는 이미 알려져 있다. 대안으로 제시된 게 종합심사낙찰제 아닌가.
“종합심사낙찰제는 가격경쟁 외에도 공사수행 능력이나 사회적 책임 등 여러 조건을 충족한 건설사가 낙찰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하지만 노동자 임금삭감을 제재하는 조항이 없다.”

✚ 임금삭감 문제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사실 저가수주경쟁은 노임단가 후려치기가 가능하기 때문에 벌어진다. 공공발주자가 전체 공사비를 100%에 맞춰도 재하청, 재재하청을 거치면서 50%에 낙찰된다. 가령 100억원짜리 공사를 50억원에 맞추려면 뭘 더 깎아야겠나. 결국 임금이다. 불법체류자가 공사 현장에 19만명이나 유입된 건 국내 노동자가 인건비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낙수효과도 사라졌다.”

✚ 임금삭감을 막으면 낙수효과가 살아난다는 얘긴가.
“낙수효과라는 게 특별한 게 아니다. 위에서 책정된 임금이 깎이지 않고, 그대로 노동자에게 전달되면 그게 낙수효과다. 임금을 법 또는 제도로 고정하면 건설사가 노동자의 임금을 깎아가며 저가낙찰경쟁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 하청을 줄 필요도 없어진다. 당연히 임금체불도 사라진다.”

✚ 저가수주 경쟁이 사라지면 건설사는 입찰현장에서 무엇으로 경쟁하나.
“공사비 단가를 낮추려면 기술·인건비·자재비 중에서 하나를 깎아야 한다. 자재비로 단가를 낮추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인건비를 삭감해왔는데 이게 금지되면, 건설사는 기술경쟁에 돌입하게 될 거다.”


✚ 건설사가 기술경쟁을 시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나.
“입찰 과정에서 기술경쟁을 하려면 숙련된 노동자가 필요하다. 임금이 고정돼 있는 상태에서 당신이라면 내국인을 쓰겠는가 아니면 외국인을 쓰겠는가. 당연히 말 통하는 내국인을 우선 채용하게 될 거다. 내국인 노동자 경쟁력이 강화될 거란 얘기다. 또 인력 외주화 관행도 사라질 거다.”

✚ 외주화 관행이 사라지고 기술경쟁이 시작되면 정규직이 늘어날 수도 있겠다.
“그렇다. 기술경쟁을 하려면 숙련된 노동자가 필요하다. 건설사가 고숙련 기능인 양성에 나서게 될 거라는 얘기다. 그럼 당연히 정규직으로 채용하지 않겠나. 건설계통 공업고등학교 졸업생의 취업문도 열릴 거다. 건설사 입장에서 봤을 때 공고 졸업생은 이미 초보기능공 수준의 기술을 가진 인재다. 탐낼 만하다.”

✚ 적정임금이 도입되면 발생할 효과가 더 있나.
“많다. 임금이 고정돼 있으니 무리하게 노동시간을 늘려 공사기간을 단축할 필요가 없어진다. 자연스럽게 산업재해도 줄어들 거다. 무엇보다 건설사가 기술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시공법 개발에 집중하고 직접시공도 하게 될 거다. 그럼 소비자는 튼튼한 건물을 공급받게 된다.”

▲ 미국·호주·독일에서는 이미 노임 적정제도를 시행하고 있다.[사진=뉴시스]
✚ 현실적으로 가능한 얘기인가.
“이미 미국은 PW(Prevailing Wage)라는 적정임금제를 시행하고 있다. 건설사가 이를 어길 시 3년간 공공공사입찰을 제한하고 형사처벌도 한다. 호주도 이와 유사한 어워드 시스템(Award system)을 운영 중이다. 독일은 6단계의 적정임금을 설정해 가장 낮은 단계는 정부가 최저임금으로 인정하는 형태로 건설노동자의 임금을 보장해 주고 있다.”

✚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왜 도입하지 않고 있나.
“인력도 기술도 없는 업체들이 건설사로 등록해 시장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어서다. 기술경쟁을 하면 구조조정될 수밖에 없는 페이퍼컴퍼니들이 적정임금제에 찬성할 리가 있겠나. 이런 기형적 구조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적정임금제 도입은 어렵다.” 노미정 더스쿠프 기자 noet85@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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