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 SPA의 반란

79억. 글로벌 SPA 브랜드 ‘자라(ZARA)’가 2014년 2월 1일부터 2015년 1월 31일까지 기록한 영업이익이 아니다. 영업손실이다. 2008년 한국에 진출한 이후 영업이익 증가율이 주춤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손실을 기록한 적은 없었다. 자라만이 아니다. 한국에 진출한 글로벌 SPA 브랜드를 둘러싸고 심상치 않은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그 틈새를 토종 브랜드가 줄줄이 꿰차고 있다.

▲ 토종 SPA 브랜드들이 공격적으로 매장수를 늘리고 있다.[사진=뉴시스]
‘2010년 1조2000억원→2015년 4조원.’ SPA(상품을 직접 제조ㆍ유통하는 전문 소매점)는 침체기를 겪고 있는 국내 의류시장의 유일한 ‘활력소’다. 시장 규모가 5년 새 약 230%나 커졌다. 그런데 글로벌 SPA의 사정은 다르다. 실적이 정체기에 빠진 지 오래다. 대표적인 글로벌 SPA 브랜드 ‘자라(ZARA)’와 ‘H&M’만 봐도 그렇다.

자라는 스페인 인디텍스사의 글로벌 SPA 브랜드다. 2007년 10월 롯데그룹과의 합작을 통해 ‘자라리테일코리아’를 설립하고 한국에 진출했다. 명동의 롯데 영플라자와 삼성 코엑스의 밀레니엄 광장에 동시 오픈하면서 국내에 소개된 이래 현재 43개(2015년 기준)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자라는 빠르게 국내 소비자의 취향을 저격했다. 첫해 343억원의 매출(영업이익 27억원)을 올리며 기분 좋은 출발을 알린 데 이어 이듬해에는 두배 이상 성장했다. 2010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매출 1000억원대(1338억원)를 돌파했다. 영업이익도 2012년부터 100억원(106억원)을 넘어섰다.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자라가 지난해 처음으로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손실 규모는 79억원에 이른다.

자라리테일코리아 측은 “2014년 2월 98억1700만원의 관세추징금으로 인한 손실”이라고 밝혔다. 당시 자라는 수입가격을 축소 신고했다는 의혹으로 광주세관으로부터 관세를 추징당했다. 이로 인해 전년에 22억원이던 판관비가 100억원대로 증가한 게 손실을 키웠다는 거다. 하지만 이 주장을 십분 받아들여도 영업이익 규모는 20억원대에 머무른다. 2012년 106억원, 2013년 118억원에 비해 한참 못 미치는 결과다. 자라가 지난해 국내시장에서 고전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얘기다.

스웨덴 SPA 브랜드인 ‘H&M’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세계적인 브랜드 ‘발망’ ‘이자벨 마랑’ ‘알렉산더 왕’ 등과 콜라보레이션한 한정판으로 매장 앞에 대기고객을 늘어서게 하는 H&M이지만 영업이익은 신통치 않다. 2012년 134억원에서 2014년 33억원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지난해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소폭 증가(33억원→38억원)한 게 그나마 위안거리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2008년 서울 명동에 첫 매장을 오픈한 미국 SPA 브랜드 ‘포에버21’은 지난해 11월 신사동 가로수길에 있는 매장을 경영난으로 폐쇄했다. 한국 패션의 상징과 같은 ‘가로수길’에서 매장이 철수한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09년 제일모직과 손잡고 국내에 진출한 스페인 SPA 브랜드 ‘망고’도 실적 부진으로 명동 및 영등포 타임스퀘어의 매장이 문을 닫아 현재 7개만 운영 중이다.

한국 시장서 고전하는 글로벌 SPA   

세계 시장을 호령하는 이들 SPA 브랜드가 한국에서 맥을 못 추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별다른 게 아니다. 현지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일단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에서 밀린다. 이들 브랜드는 트렌드에 맞춰 빠른 주기로 제품을 제작ㆍ유통하는 ‘패스트패션(Fast Fashion)’이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 트렌디한 디자인, 빠른 회전율이 경쟁력이다. 하지만 자라의 가격대는 다른 SPA 브랜드보다 높다. 게다가 자라가 진출해 있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도 비싸게 판매되는 것으로 알려져 국내 소비자들의 원성을 샀다.

사이즈와 디자인도 문제다. 이들 브랜드는 글로벌 표준에 사이즈가 맞춰져 있다 보니 한국인의 체형과 맞지 않는다. 디자인도 다소 보수적인 국내 소비자의 취향과 멀다는 게 패션전문가들의 이구동성이다. 우리와 체형이 비슷하고 베이직한 디자인이 주를 이루는 유니클로가 글로벌 SPA 브랜드로는 유일하게 좋은 실적을 내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니클로는 2014년 9월 1일부터 2015년 8월 31일까지 매출 1조원을 넘어 1조1170억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익도 1563억원을 올리는 등 매년 최고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 H&M은 세계적인 브랜드들과 콜라보레이션해 매장 앞에 고객을 줄 세우고 있지만 영업이익은 신통치 않다.[사진=뉴시스]
반면 토종 SPA 브랜드는 공격적인 물량 공세로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이랜드그룹의 ‘스파오(SPAO)’와 ‘미쏘(MIXXO)’, 신성통상의 ‘탑텐(TOPTEN)’이 대표적이다. 이랜드가 2009년 론칭한 스파오는 현재 전국에 70개 매장을 운영 중이다. 해마다 10개 이상의 매장이 새롭게 문을 열고 있다. 포에버21이 떠난 가로수길 매장을 꿰찬 브랜드도 스파오다. 매출도 매년 증가세다. 론칭 첫해 100억원의 매출을 올린 이후 2011년 350억원, 2012년 700억원, 2013년 1000억원, 2014년 1400억원으로 꾸준히 늘어났다. 이랜드 관계자는 “2주마다 매장의 제품 대부분을 신상품으로 교체하는 전략이 맞아떨어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스파오를 론칭한 이듬해에는 여성 SPA 브랜드 미쏘를 출시했다. 2010년 1호점을 오픈해 현재 전국에 55개의 매장을 운영 중이다. 스파오와 마찬가지로 매년 매장수와 매출이 함께 늘어 2014년에는 110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랜드 관계자는 “서양인의 체형에 맞춰진 해외 SPA 브랜드의 약점을 보완했다”고 미쏘의 성장 이유를 밝혔다.
 
신성통상이 2012년 선보인 탑텐은 20대를 주 고객으로 시즌마다 10가지 주력 상품군을 선보인다. 지난해 기준 108개 매장에서 17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스파오, 미쏘보다 늦게 출발했지만 매장 수는 가장 많다. 그만큼 공격적으로 매장수를 늘리고 있다.

승기 잡은 토종 패션 브랜드

추호정 서울대(의류학) 교수는 토종 SPA 브랜드의 순항에 대해 “국내 패션브랜드의 경쟁력이 그만큼 커졌다는 방증”이라고 진단했다. 해외의 경우 내셔널 브랜드의 영향력이 강하지 않아 글로벌 SPA 브랜드가 성공적으로 안착했지만 국내 시장은 다르다는 거다. 국내 패션소비자가 생각보다 까다롭다는 게 그 이유다. “SPA 시장 경쟁률이 치열하다. 그런 상황에서 토종 브랜드들이 까다로운 국내 패션소비자들의 취향을 잘 파악해 경쟁력에서 앞서고 있다.” 경기가 좋지 않아 패션시장이 위축돼 있지만 토종브랜드의 경쟁력으로 글로벌 SPA와의 한판 승부에서 승기를 잡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김미란 더스쿠프 기자 lamer@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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