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책 ‘슬로 트렌드’ 담다
낡은 책 ‘슬로 트렌드’ 담다
  • 김미란 기자
  • 호수 186
  • 승인 2016.04.11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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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 중고책의 역주행

눈에도 잘 띄지 않는 골목의 한 귀퉁이. 책 먼지가 폴폴 날리고, 낡은 종이냄새가 코를 간질이는 헌책방.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헌책방이 모두 이럴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제는 서울 한복판, 강남대로변까지 진출해 명실상부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사라질 줄 알았던 종이책이 역주행을 하고 있는 거다.

▲ 디지털 시대에 중고책이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사진=김미란 기자]
‘STOP PRESS.’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가 지난 3월 26일(현지시간) 발행한 마지막 종이신문 표지 문구다. 1986년부터 2016년 최근까지 돌아가던 윤전기를 멈췄다는 선언이었다. 인디펜던트 소유주인 ESI 미디어는 “종이 신문 발행을 중단하고 온라인 서비스만 운영한다”고 밝혔다.

인디펜던트는 영국 주요 언론 중 종이신문 발행을 중단하는 첫번째 주자가 됐다. 이에 앞선 2012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종이잡지를 폐간했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사 중 하나인 영국의 ‘로이드리스트’도 2013년 창간 279주년 만에 인쇄판을 폐간하고 디지털 신문으로 전환했다. 해외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최근 국내 모 월간지도 34년 만에 무기한 휴간에 돌입하며 사실상 폐간 수순을 밟고 있다. 각각 2001년, 2002년부터 발행되던 모 영화잡지와 패션잡지도 지난해 역사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종이책도 마찬가지다. 서적 출판업 경상지수(2010년=100 기준)는 2011년 98.0이었던 것이 해마다 하락해 지난해 92.0을 기록했다. 가구당 월평균 서적구입비도 꾸준히 하락세다. 한국출판저작권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2인 이상 전년(1만8154만원) 대비 8.4% 감소했다. 통계를 공표하기 시작한 2003년 이후 역대 최저치다.

자연스레 서점 수도 줄었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에 따르면 지난해 도서만 판매하는 순수서점은 1559개로 집계됐다. 2013년 1625개에서 66개(4.1%)가 줄어들었다. 한국서련 관계자는 “1996년 5378개로 정점을 찍은 전국 서점 수는 20년 사이 70% 이상 줄었고, 여전히 매년 감소하는 추세”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유독 중고책 시장의 날씨만은 ‘맑음’이다. 중고서점은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2008년 처음 온라인을 통해 중고책 거래를 시작한 알라딘커뮤니케이션은 2011년 서울 종로에 오프라인 중고서점을 냈다. 이를 시작으로 올 4월 현재 전국에 23개의 매장을 운영 중이다. 매출도 2012년 1683억5167만원에서 지난해 2393억8518만원으로 42.2%나 증가했다.

온라인서점인 ‘예스24’도 최근 오프라인 중고서점을 냈다. 예스24는 지난해부터 중고책 매입 서비스인 ‘바이백’을 운영하고 있다. 이 서비스의 연장선 개념으로 4월 1일 강남점을 오픈해 중고서적 판매에 본격 돌입했다. 출판업계가 실적 부진에 허덕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중고서점의 비약적 성장은 분석할 만한 가치가 있다.

새 책엔 없는 특별한 무엇

한편에선 ‘가격이 저렴하니까 중고책이 많이 팔리는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하지만 이 의견은 ‘디지털 시대엔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가설에 막힌다. 가격 때문이라면 중고책이 아닌 전자책을 보면 그만이라서다. 이는 새책이 갖고 있지 않은 특별한 무언가가 중고책에는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중고책 덕에 ‘디지털 시대에도 사람들이 책을 읽는다’는 가설이 성립된다면 새책도 호황을 누려야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중고책만의 특별함은 대체 뭘까.

▲ 품절·절판된 책을 발견하는 것도 중고서점을 찾는 재미 중 하나다.[사진=뉴시스]
도서 전문가들은 소장가치로서의 의미, 사라져가는 것을 얻게 되는 작은 기쁨, 노스탤지아 등이 중고책에 투영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디지털 시대에서 인문학이 주목을 받듯 중고책도 마찬가지 현상이라는 얘기다.

4월 6일 서울 종로구의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만난 김은미(가명ㆍ여ㆍ55)씨는 “손때 묻은 책들 사이에서 읽고 싶었던 책을 발견했을 때 카타르시르를 느낀다”면서 중고서점을 찾는 이유를 설명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5년 만에 고국을 방문해 일부러 중고서점을 찾아왔다는 김씨는 이날 평소 좋아하던 작가인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를 비롯해 세 권의 책을 샀다. “새책을 살 수도 있어요. 오히려 구입하기에는 새책이 훨씬 쉽죠. 하지만 중고책은 그 시절의 나를 한 번 더 떠올리게 하는 묘한 힘이 있어요. 간혹 나와 같은 취향을 가진 이전 주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소소한 재미도 있고요.”

디지털 시대를 습격한 아날로그
  
광화문의 한 중고서점에서 만난 최명진(가명ㆍ남ㆍ75)씨는 「허삼관 매혈기」와 「구운몽」을 골랐다면서 아무리 못해도 열흘에 한권씩은 책을 읽는다고 말했다. 그는 중고책의 소장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요즘 나오는 책들은 한번 읽고 다시 안 보게 돼요. 하지만 중고책은 새책에 비할 수 없는 묵직함이 있죠. 물론 주머니 사정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하지만 그것보다 내용의 가치를 더 따지다보니 자연스럽게 중고서점을 찾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 중고책 열풍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트렌드를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슬로 소비문화’의 전형이 중고책에서 나타나고 있어서다. 디지털 시대의 중고책은 단순한 ‘종이책’이 아니다. 이 낡은 책은 문화요, 향수요, 기쁨이요, 트렌드다.
김미란 더스쿠프 기자 lamer@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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