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동네 슈퍼서 배워라

▲ 소비자가 곧 생산자이자 판매자인 생활협동조합 형태의 소매점 미그로스와 쿱은 스위스 소매시장을 장악하고 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유럽에는 동네마다 아기자기한 소매점들이 많다. 대형마트 혹은 대기업 편의점뿐인 우리나라와는 많이 다르다. 유럽이라고 해서 편의점이 없는 것도, 특별히 대기업을 규제하면서 소매점에 정부 지원을 늘린 것도 아니다. 결국 소매점들이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건데, 그 비법은 차별화와 발 빠른 대응에서 찾을 수 있다.

스위스 융프라우 등산 열차를 타기 위해 인터라켄을 들렀을 때다. 인터라켄은 고지대에다 강변까지 끼고 있어서인지 바람이 심하게 분다. 이 때문에 종종 소매점(동네 슈퍼마켓)에 들러 온장고溫藏庫에 데운 차와 과일을 사먹곤 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동네 슈퍼마켓을 스위스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는 거다. 편의점과 대형마트에 밀려 동네 슈퍼마켓이 사라진 우리나라와 대비된다.

스위스에 즐비한 소매점들은 바로 미그로스(migros)와 쿱(coop)이라 불리는 생활협동조합(생협)이다. 생협이라고 해서 특별히 어려운 발걸음을 떼야만 만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생협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일단 규모부터 다르다. 미그로스와 쿱은 스위스 소매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미그로스는 스위스 최대 소매기업으로 조합원만 200만명에 달한다. 또한 스위스에서 가장 많은 8만30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다. 쿱 조합원은 미그로스보다 많은 약 250만명이다. 스위스 인구가 700만명이니 스위스 국민 절반 이상이 미그로스 혹은 쿱의 조합원인 셈이다. 국민이 적극적인 시장 참여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거다.

미그로스와 쿱의 운영구조는 ‘수직통합 모델’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제조 공장과 유통 매장을 보유하고 있어 생산부터 판매까지 모두 담당한다. 때문에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서부터 알프스 산골짜기에 이르기까지 미그로스와 쿱 매장이 없는 곳이 없다. 규모가 큰 만큼 미그로스와 쿱은 스위스 국내총생산(GDP)의 8%를 책임지고 있다. 스위스에서 ‘스위스의 물가 안정은 미그로스와 쿱의 가격정책에 달려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미그로스나 쿱과 같은 소매점은 사실 스위스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유럽 전역에서 이와 비슷한 경쟁력을 갖춘 동네 슈퍼마켓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처럼 유럽에 소매점이 발달한 데는 이유가 있다. 일단 지정학적 측면이 있다. 유럽의 국경이 완전히 허물어져 4000㎞의 거리를 여권 검사도 없이 여행할 수 있게 됐다지만, 유럽은 엄연히 국가들이 모인 연합체다. 우리나라만한 국가 수십개가 뭉쳐 유럽연합(EU)을 이루고 있다. 그만큼 생활 방식도, 소비문화도 다르다.

당연히 미국의 광활한 유통채널 방식보다는 아기자기한 소매방식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유럽인들은 구매를 하더라도 친사회 혹은 친환경 기업인지 따져가며 구매하는 성향이 강하다. 예컨대 종업원 관리에 문제가 있는 기업이라면 유럽에서 크게 성공하기는 힘들다. 소비자들이 외면하기 때문이다. 규모의 경제만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시장이 아니라는 거다. 

소비자가 시장을 만든 유럽

또한 유럽인들이 미국이나 신흥 경제국들에 비해 전통적인 가치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도 소매점들을 살리는 원동력이다. 대량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미국의 유통채널 방식, 인건비를 낮추고 가격으로만 승부하는 우리의 방식과는 크게 다르다. 유럽에 아기자기한 소규모 점포나 매장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런 면에서 ‘스스로 쓸 만큼 생산해서 적당히 소비하는’ 생협의 시스템은 유럽인들의 취향과 잘 어울린다.

유럽의 소매점들이 유럽의 문화와 가치관에만 기대서 성장한 건 아니다. 유럽에도 편의점은 진출해 있다. 하지만 현재의 소매점들이 대기업 편의점에 결코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편의점들이 전통적인 소매점과 비슷한 형태로 흡수되거나 소매점이 편의점과 차별화를 위해 지역 특성에 맞춰 다양한 형태로 탈바꿈하고 있다.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는 거다.

▲ 유럽의 일부 소매점은 지역 농가와의 협업을 통해 로컬푸드를 판매하고, 그 수익금을 공평하게 분배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지역 농가와의 협업을 통해 로컬푸드(loc al food)를 판매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요즘 소비자들은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친환경 식품을 원한다. 때문에 유럽에는 지역 농가들로부터 신선한 농산물을 제공받아 공급하는 소매점들이 늘고 있다. 소매점이 전통시장을 닮아가는 꼴이다. 협업을 통해 발생한 매출은 농가와 슈퍼마켓 혹은 편의점이 합리적으로 나누고 분배한다. 생산자와 유통업체가 모두 공생하는 형태다. 이런 유통 형태는 소비자 입장에서도 유용하다. 가장 가까운 동네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에서 품질과 안전성을 신뢰할 수 있는 농산물을 합리적인 가격에 구할 수 있어서다.

식사대용의 테이크아웃 식품이 편의점 인기품목이 된 것도 마찬가지다. 최근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유럽도 경제 상황이 썩 좋지 않다. 때문에 외식비용이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편의점에서 제공하는 식사대용 식품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네덜란드의 가장 큰 식품체인점인 알베르트 헤인(Albertheijn)이 운영하는 ‘알베르트 헤인 투고(To Go)’의 경우 매장 면적은 100~300㎡(약 30~90평) 정도지만, 24시간 가동하는 키친과 베이커리를 설치해 테이크아웃 식품을 제공하고 있다. 단순한 편의점에서 진화한 형태다. 

트렌드에는 발 빠르게 대응

첨단기술을 접목하기도 한다. 유럽의 동네 슈퍼마켓이나 편의점, 중대형 마트 등 거의 모든 소매점들은 최근 무인판매대를 확대하고 있다. 휴대전화를 이용한 새로운 마케팅과 지불방식도 빠르게 자리잡아가고 있다. 벨기에의 슈퍼마켓 체인 델하이즈(Delhaize)가 세계 최초로 도입한 ‘모바일 셀프 스캐닝(mobile self scanning) 서비스’가 대표적인데, 이 서비스는 고객이 매장 내에서 휴대전화처럼 생긴 바코드 리더기를 들고 다니며 상품 값을 직접 계산, 지불하는 방식이다.

종합하건대 유럽의 소매시장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분명하다. 우리나라의 동네 슈퍼마켓들은 대기업의 입점 규제만 외칠 게 아니라 지역과 공생하는 소매점,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소매점, 천편일률적이지 않고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는 소매점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거다.
김영호 김앤커머스 대표 tigerhi@naver.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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