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명장, ‘간신’ 탓에 두번 죽다
조선의 명장, ‘간신’ 탓에 두번 죽다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 호수 186
  • 승인 2016.04.15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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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109

명량해전의 승첩 소식을 들은 명나라 장수 양경략은 “조선에도 이런 명장이 있다는 말을 중국에서부터 들었다”면서 심히 기뻐했다. 특히 “13척의 병선으로 330여척의 적선을 이소격중하여 대첩한 일은 고금 천하에 드문 일”이라면서 “붉은 비단 두필과 은 50냥을 이순신에게 보내달라”고 조선 조정에 의뢰했다. 이런 전공에도 이순신은 아무런 상도 받지 못했다.

 
이순신은 잔치가 끝난 뒤 제장을 모은 뒤 이렇게 말했다. “명량해전에서 역전한 공로를 찬양한다. 처음에 회피하며 전진하지 않던 죄도 용서한다.” 중군장 미조항첨사 김응함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소인이 살아서 사또께 뵈올 면목이 없소.” 이순신은 엄정한 낯으로 “앞으로 여러 번 싸움이 있을 것이니 이번을 거울삼아 죽기로 싸울 것을 결심하라”고 말하면서 한번 더 ‘필사즉생 필생즉사’ ‘일부당경 족구천부’라는 병법의 뜻을 설명하였다. 이번 명량해전의 전과는 대략 이러하다. 당파된 일본병선은 33척이요, 철삭에 걸려 침몰한 건 270척이요, 죽은 적군은 4000여인이요, 부상한 자는 1만여인이다.

이순신 함대가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기 전, 한양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남원과 전주를 함락한 일본 육군이 경상ㆍ전라 양도의 군읍을 거의 점령하고, 적장 모리수원, 가등청정, 흑전장정이 이끄는 대군이 충청도 금강을 건넜다”는 보고가 한양에 당도했기 때문이다.

조정은 또 소동하였다. 적병이 500리 밖에만 왔다 하면 벌써 봇짐을 싸고 달아날 생각만 하는 소위 대관이란 작자들은 선조에게 이렇게 권했다. “내전과 동궁은 먼저 서울을 떠나 황해도 수안으로 보내고 평양에 있는 명나라 경략사 양호를 재촉하여 한양으로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명나라 경략사 양호는 이 급보를 듣고 군사를 독촉하여 하루 낮밤 만에 한양에 달려왔다. 그후 남산에 올라 위세를 보이는 한편 동작진銅雀津에 부교를 가설하고 용장인 부총병 해생解生에게 철기병 3000명을 주었다. 여기에 참장 우백영 양등산楊登山의 군사 5000명, 유격장군 파새擺賽 파귀頗貴의 군사 3000명 등을 합쳐, 도합 1만여명의 군사로 일본군을 막게 했다. 또한 제독 마귀를 보내어 수원에 주둔케 함과 동시에 기병 2000명을 동원해 해생을 돕게 했다.

▲ 이순신의 막대한 공은 당파 싸움에 가렸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명장수 해생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금오평金烏坪 일명 소사평素沙坪에 이르렀다. 들판이 넓적해 참 용무지지(적과 전투를 벌일 만한 장소)라고 해생은 말하였다. 군사를 나누어 세 길목을 지키고 또한 좌우로 나눠 좌측은 유포柳浦, 우측은 영통靈通으로 나가도록 했다.

마침내 일본군과 만난 이들은 하루에 여섯 번이나 전투를 벌였고, 일본군이 참패를 당하고 퇴각했다. 피아의 시체가 들에 널렸지만 명군보다 일본군이 많이 죽었다[※ 참고: 1597년 9월 7일 직산전투. 명량해전 이전의 일이다.]

육지와 바다에서 참패한 풍신수길

명장 해생은 군중에 “일본인이 본래 교활하니 내일에는 반드시 싸우다가 거짓 패하여 산로로 갈 것이다. 우리가 만일 적을 추격한다면 우리는 기병이라 산길이 이롭지 못하니 따라 치지 말라”고 명령을 하달했다.

다음날 아침 모리수원은 중군中軍, 가등청정과 흑전장정은 각각 좌우군左右軍을 맡아 조총을 난사하면서 달려들었다. 해생, 우백영 등 명나라 제장은 대포를 연속해서 쐈다. 아울러 철기병 3000명과 우백영의 정예부대가 내달아 쇠방망이로 일본군을 두들겨 팼다. 교전 몇시간 만에 적병이 지탱하지 못한 채 많은 사상자를 내고 목천木川과 청주를 향하여 물러났다. 이 싸움에 일본군의 사상자가 수천인이라 하고 명병의 손해가 600여인이라 하였다.

모리수원의 군사는 청산靑山ㆍ황간黃磵ㆍ성주를 분탕질하고 전라도 한쪽을 거쳐 영남 해안으로 내려갔다. 가등청정의 군사는 청주ㆍ보은ㆍ상주ㆍ인동ㆍ대구를 거쳐 울산으로 내려가고 흑전장정의 군사는 공주ㆍ천안ㆍ평택平澤으로 향했다. 육지와 바다에서 모두 패하자 풍신수길의 웅대한 뜻이 사라지고 있었다.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은 승전한 함대를 몰고 전라도의 서해안인 당사도唐沙島ㆍ법성포法聖浦ㆍ칠산七山 바다를 순시했다. 그동안 승전을 축하하는 백성들에게서 군량과 동복을 얻고 각 읍 각 진에 있는 군기도 취득하였다. 민선 중에서도 크고 튼튼한 배를 무장해 병선에 편입했다. 피난민 중 재용지사를 권유하여 군사도 장정 500여인을 더 얻었다. 이순신의 휘하 장졸은 간 곳마다 백성들의 눈물겨운 환영을 받아 의용지기를 더욱 양성하였다. 또한 의용단을 설립하여 순신을 따르려는 장사들도 많이 생겼다.

이순신의 명량해전 승전 소식은 싸움이 끝난 지 16일 후에야 한양에 들어왔다. 선조는 첩서를 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만조백관을 모아 축연을 열고 이 첩보를 명나라 대장 양경략에게 보내었다.

남별궁에 있다가 이 첩서를 본 양경략은 “조선에도 이런 명장이 있다는 말을 중국에서부터 들었다”고 말하면서 심히 기뻐했다. 특히 “13척의 병선으로 330여척의 적선을 이소격중하여 대첩한 일은 고금 천하에 드문 일”이라면서 “붉은 비단 두필과 은 50냥을 이순신에게 보내달라”고 조선 조정에 의뢰했다.

선조는 손수 붓을 잡아 순신에게 “가상하다”는 교서를 주고 표창을 했다. 아울러 충훈부忠勳府 당상堂上과 도승지를 불러 이순신에게 정일품 우의정의 직첩을 주라고 하교하였다. 그러자 이산해ㆍ윤두수ㆍ이항복 등의 제신이 “이순신의 작위가 정일품에 달하면 전쟁이 평정하는 날엔 더 벼슬을 올릴 여지가 없으니 후일을 기다려 하십시오”라면서 교묘하게도 선조의 뜻을 반대했다. 그래서 막대한 공을 세운 이순신은 냉수 한잔의 상도 받지 못하였다. 이는 유성룡의 공을 미워하는 간신들이 색안경을 쓴 채 이순신을 보는 까닭이었다.

간신 탓에 상도 못 받은 순신

선조는 “이 자들이 또 당파싸움을 하는구나”라면서 탄식했지만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부득이 이순신의 부하제장들에게만 벼슬을 주었다. 다만 배설은 군사를 버리고 도주했다는 이유로 효시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명량의 승리는 배설이 남겨 놓은 전선에 힘입은 바가 많으니 배설이 어찌 도움이 없었다고 하겠는가”라며 아쉬워했다.

명량해전의 전공은 이순신 만사일생萬死一生의 심력과 심혈을 다한 결과물이었다. 조정에 있는 간신들도 놀라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전공이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만고에 없는 명장을 간신들은 ‘내 편’이 아니라는 이유로 미워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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