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약속에 대한 소고

▲ 정계은퇴와 대선불출마 약속은 문재인 전 대표에게 좋은 기회가 될지 모른다.[사진=뉴시스]
15년 전쯤 얘기다. 증권회사 J사장이 취임 초 전 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자사의 주가가 실적에 비해 너무 낮다며 그해 연말까지 목표가격을 밑돌면 책임지고 사직하겠다고 선언했다. 언론사에 일제히 그 기사가 실렸고, 투자자들은 상장사 대표가 주가를 보증한다며 환호했다. 그런데 웬걸, 그날 이후 주가는 내리막길을 탔다. J사장은 임기를 마칠 때까지 칩거하다시피 했다. 여의도 증권가에서는 인재로 통했던 그가 말 한마디 때문에 제대로 활약해보지도 못하고 증권계를 떠난 것을 아쉬워했다.

4ㆍ13 총선 직전인 8일 광주를 방문한 문재인 전 대표는 “호남에서 지지해주지 않으면 대선출마도 안 하고, 정계를 은퇴하겠다”며 비장한 표정으로 선언문을 읽었다. 문 전 대표의 지지 호소에도 더불어민주당은 호남권 전체의석 28석 중 겨우 5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민주화의 성지이자 호남의 중심부인 광주에서 1석도 얻지 못한 것은 제1야당에게 가슴 아픈 대목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90% 가까운 지지율로 문 전 대표를 지지했던 호남민심이 등을 돌린 셈이다. 따라서 문 전 대표가 호남과의 약속을 지킨다면 두말없이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대선출마도 포기해야 한다.

물론 문 전 대표의 처지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 위기에 처한 당을 구하려는 충정에서 한 말인데, 그 말 한마디로 자신의 운명을 재단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는 얘기다. “호남에서 지지해주지 않으면”이라는 말을 ‘수도권에 있는 호남출신 인사까지 포함해서’라고 폭넓게 해석해달라는 변명도 가능하다. 더불어민주당은 새누리당보다 1석이 많은 123석을 챙겼고, 수도권에서 대승했으니 아예 근거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좀 구차하지 않은가. 더불어민주당이 수도권에서 대승한 배경에는 ‘오만한’ 새누리당에 비해 자신의 정치적 생명까지 내던지겠다고 선언한 문 전 대표의 결연한 의지가 일정부분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구구하게 여론을 듣는다며 시간을 끌지 말라. 약속대로 정계은퇴를 하고, 대권도전도 않겠다고 선언하라. 그리고 외국으로 나가라고 권하고 싶다. 거의 모든 영역에서 동맥경화증에 걸린 한국사회를 좀 더 고민하고,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한국의 미래를 고민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지금 한국의 가장 큰 고민은 노예의 삶을 살던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홍해를 건넌 모세와 같은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권주자에게는 시대적 소명과 희생정신이 필요하다. 김영삼ㆍ김대중ㆍ노무현 대통령의 탄생은 숱한 역경 속에서도 자신을 아끼지 않고 내던진 희생정신이 바탕이 됐다. 이명박 대통령은 기업인 출신으로 경제를 살려달라는 간절한 시대정신의 덕을 봤다. 박근혜 대통령은 굴곡진 삶에 굴하지 않고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 원칙주의가 높은 점수를 받았다. 불행하게도 문 전 대표는 이제까지 시대적 소명과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별로 없다.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의 주인공인 일본 여성 초초상은 사랑하는 미국인 해군장교 핑카튼과 달콤한 결혼식을 올리고 꿈결 같은 신혼생활을 보낸다. 얼마 후 남편이 미국으로 떠나자 ‘그 어떤 개인 날’ 그가 돌아오면 모든 고생이 영광으로 바뀔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아이와 함께 힘겹게 살아간다.

오랜 기다림 끝에 다시 핑카튼을 만나지만 그는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한 상태였다. 초초상은 충격을 받고 단도로 자결한다. 기다림은 항상 불확실성이라는 삶의 조건으로 인해 무너지게 마련이다. 핑카튼은 초초상과의 약속을 가볍게 여긴 나머지 한 여성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국민은 세일스피어의 5대 희극 중 하나로 꼽히는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아니다. 샤일록은 돈을 갚지 않으면 살 1파운드를 베어내겠다는 약속을 집행하려 했지만, 판사로 변장한 포샤로부터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살만 베어내라는 명령을 듣고 진퇴양난에 빠진다.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분노한 국민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살을 선뜻 내어주려는 큰 그릇의 정치인에 열광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번 호남에서의 정계은퇴와 대선불출마 약속은 문 전 대표에게 하늘이 내린 또 다른 기회일지 모른다.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천천히 서둘러라’는 좌우명으로 로마 번영기를 열었다. 여유와 느긋함을 갖고 서두르는 속에서 한적한 치열함의 미학은 빛을 발한다. 대권을 향해 조바심 내지 말고, 강태공처럼 세월이라는 강에 낚싯대를 드리우면 기회는 찾아온다. 아무리 사소하고, 아무리 억울하더라도 약속은 약속이다.
윤영걸 더스쿠프 부회장 yunyeong0909@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