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110

일본 대함대가 참패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모리수원ㆍ가등청정흑전장정의 무리는 충청도 천안 방면에 있었다. 이들은 부하에게 명을 내려 아산에 있는 이순신의 가족을 잡아다가 군중에 볼모를 삼으려 했다. 그때 이순신의 본가에서도 일본군 일개 부대가 백암리를 향하여 풍우같이 몰려온다는 급보를 받았다.

 
직산대첩에서 패한 일본 육군들은 해남으로 내려가 배를 잡아타고 자신들의 경상도 진지로 가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협판안치 이하 제장의 수군이 명량에서 참패를 당하여 300여척의 병선이 상실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순신을 크게 원망하였으나 감히 정면으로 싸우지는 못했다.

그 무렵, 조정은 상주목사 정기룡을 진주병사로, 곤양군수 이광악을 전라병사로 제수하였다. 그동안 이순신은 군사를 더 뽑고 병기를 제조하며 거북선을 만들어 불과 몇 개월 만에 병선을 70여척으로 만들었다. 그후 우수영을 떠나 벽파진을 지나 해남으로 향하였다. 때는 10월 10일께였다. 그 이튿날 함대가 어란진 앞바다에 다다랐다. 이순신은 탐정을 보내어 해남에 머물러 있는 적정을 살피게 하였고, 이내 보고가 들어왔다. “적선들이 우리 함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놀라 ‘수전水戰의 염라대왕 이순신이 또 온다’ 하여 당황망조하여 동남으로 달아났소.”

놀랄 만한 보고는 또 있었다. “해남 향리 송언봉宋彦逢과 신용愼容이란 두 놈이 적진에 들어가 적군의 앞잡이가 되어 사림士林을 많이 살해하였다. 동복 진사 김우추金遇秋란 놈은 적장에게 글을 보내어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며 누구를 다스린들 백성이 아니랴. 하나의 전을 받아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하노라’고 했다.”

보고를 모두 들은 순신은 개탄하면서 순천부사 우치적에게 명을 내렸다. “육로를 이용해 해남으로 가서 치안을 유지하고 남은 적을 소탕하라.”

이때 달아난 적의 뒤를 따라가던 탐망선의 군사가 적이 버린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궤’ 하나를 건져 순신에게 바쳤다. 제장들은 궤를 열어보기를 청하였으나 순신은 듣지 않고 그 궤의 허리를 톱질하여 끊으라 하였다.

▲ 일본 적군들과 장수는 당돌하고 대담한 이면을 보고 과연 이순신 장군의 아들답다고 생각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이를 본 장졸들이 그 이유를 물었다. 이순신은 답했다. “이는 마다시의 부하가 그 주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궤 안에 숨었다가 우리가 궤를 열 때 불시에 튀어나와 사람을 많이 죽이고 자기도 죽자는 계획일 것이다. 옛날 예양豫讓의 고사를 모방함이라.” 제장은 탄복하여 순신을 신으로 숭배하였다.

1597년 10월 14일 이순신은 밤에 꿈이 흉하여 궁금하고 걱정하던 차에 집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개봉하기도 전에 골육이 떨리고 심기가 어지러웠다. 서간은 차자次子 예䓲의 것인데 겉면에 통곡痛哭이 써  있기에 떼어본 즉 막내 면葂의 전사 소식이었다. 순신은 애통하기를 금치 못하였다.

순신의 지혜에 탄복하는 제장들

일본 대함대가 참패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모리수원가등청정흑전장정의 무리는 충청도 천안 방면에 있었다. 이들은 부하에게 명을 내려 아산에 있는 이순신의 가족을 잡아다가 군중에 볼모를 삼으려 했다.

그때 이순신의 본가 역시 일본군 일개 부대가 백암리를 향하여 풍우같이 몰려온다는 급보를 받았다. 장자 회薈는 부친을 따라 순신의 진중에 있었고 차자 예가 부친으로부터 가호를 보전할 방책을 들었기 때문에 가정家丁을 내놓아 사방의 동정을 살핀 후 모친 방씨와 집안사람들을 데리고 피난할 준비를 하였다.

막내 이면은 나이 스물하나요, 아직 총각이었다. 혈기가 넘치고 말타기 활쏘기와 검술에 정통하였으며 무용이 절륜하여 부친의 풍도가 있었다. 순신도 항상 자기를 닮은 것을 더 사랑하였다.

이날 면은 “그놈들이 분명히 한산도와 벽파진 대패전의 원수를 우리에게 갚으려 하여 우리 가족을 잡아다가 부친을 곤란케 하자는 계획인 듯하니 나는 앞에 서서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여 그런 비루한 계획을 단념하도록 할 것이니 형님은 모친을 모시고 뒷문으로 나가 피난하세요”라면서 ‘수단경예귀신동색手段鯨利鬼神動色’이라고 새긴 7척 장검을 들고 적병이 온다는 곳으로 마주 나갔다.

이면은 집 동쪽에 있는 작은 고개를 넘어 말을 달렸다. 5리나 간 즉 약 50명의 기보병이 항오를 지어온다. 이면은 적을 향하여 “너희들 중에 통역이 있거든 나서라” 하고 외쳤다. 말 탄 적장과 통역이 나서며 “네가 누구냐? 이순신의 아들이냐?” 하고 묻는다. 이면은 “오냐, 나는 이순신 장군의 셋째 아들 이면이다. 너희들에게 깨우쳐 줄 말이 있어서 왔다. 들은즉슨 너희 임금 풍신수길이 100만의 군사와 1000척의 병선이 있다 하거든 벽파진의 원한을 못 갚아서 이순신 장군의 집을 습격하고 그 가족을 해하려고 하니 그런 비겁한 야만적 계획이 어디 있겠느냐?” 하였다.

적병은 그 당돌하고도 대담한 것을 보고 놀랐다. 적장은 “내가 너의 가족을 죽이러 온 것이 아니다. 만일에 네가 항복만 하면 너도 살리고 너희 가족도 해하지 아니하고 데려다가 평안히 살게 할 것이다” 하였다. 이면은 껄껄 웃으며 “이순신 장군의 아들이 항복할 듯싶으냐? 잔말 말고 내 칼을 받아라!” 하고 칼을 들어 그 장수를 겨누었다. 좌우에 있던 적병들이 이면에게로 달려들려 할 때에 그 적장은 소리를 질러 그것을 못하게 막았다.

일본 장수와 맞서 싸운 이면

적장은 “오냐, 네 뜻이 장하다. 그러면 나하고 싸워볼까”라면서 그 장수는 말을 달려 나왔다. 그 장수의 이름은 용천대도龍泉大刀. 흑전장정 막하의 일류 검객이었다. 수염이 팔자로 나고 얼굴이 크며 눈에는 광채가 있었다. 또한 키가 장대하고 몸에 갑옷을 입었다. 그는 이면을 보고 “네가 갑옷과 투구를 아니 입었으니 나도 갑옷과 투구를 벗을 테다”면서 진중에 들어가 벗고 나왔다. 이면은 적장의 행동을 보고 적이나마 무사의 기풍이 있는 것을 장하게 여겼다.

적장 용천대도는 칼을 들어 이면의 머리를 엄습하였다. 그는 이면을 어리게 본 것이었다. 이면은 적의 칼을 피하면서 적장의 왼편 옆구리를 칼끝으로 찔렀다. 적장의 왼편 옆구리에서는 피가 흘렀다. 그러나 중상을 입은 것은 아닌 듯하였다. 적장 용천대도는 청년 하나를 어쩌지 못하랴 하다가 이면의 칼 쓰는 법이 심상치 아니한 것을 보고 정신을 가다듬어 두 사람은 어우러져 싸웠다. 이면은 공격을 버리고 수세를 취하여 적장의 칼 잘 쓰는 틈을 타서 찌를 생각을 가졌다. 용천대도는 나이 어린 적에게 먼저 옆구리를 찔린 것 때문에 연해 공격을 취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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