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멘토링(34) 정민 한양대 인문대학장 편

정민(55) 한양대 인문대학장은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삶의 질이 더 황폐해졌다”고 말했다. 기술로 해결할 문제를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이 맡고 나면 결국 남는 건 인문학이라고 했다. 삶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인문학이야말로 100세 시대를 사는 지혜의 샘이라고 주장했다.

▲ 정민 한양대 인문대학장은 “삶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덮어두고 살다가는 은퇴 후의 삶이 공포스러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사진=지정훈 기자]
Q 멘티가 멘토에게

 ‘인구론’은 “인문대 출신의 90%가 논다”고 해서 생긴 말입니다. 인문 전공 탓만은 아니겠지만, 친구들과 같은 출발선에 서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뒤처졌습니다. 조금 느리게 가는 것일 뿐 결국 더 멀리 갈 거라고 자위해 보지만 그런다고 자책감을 벗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어떻게 해야 이 정체감에서 벗어날 수 있나요?

A 멘토가 멘티에게

인문학을 전공하면 더 멀리 가는 거 맞아요. 지금 시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은퇴 후 삶을 준비해야 합니다. ‘노후 설계’ 이야기가 아니라, 세컨드 라이프에 대한 시간 투자를 돈 벌 때 해야 한다는 겁니다. 발등에 떨어진 후 하려면 혼란스럽죠.

수명이 늘어 은퇴 후 영위할 절대 시간이 연장됐습니다. 50대에 직장을 그만두면 30~40년의 세월을 감당해야 돼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냥 살아가는 공포의 시간, 그런 점에서 어쩌면 괴물 같은 시간이 될지도 몰라요. 삶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덮어두고 살다가는 이 공포를 제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자신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면 보복 운전 같은 분노 범죄에 휩쓸려 정신과적 치료를 받아야 할지도 몰라요.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세태도 나는 이와 무관치 않다고 봅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막힌 숨통을 열어 놓을 수 있는 ‘게토’가 필요합니다. 100세 시대에 필요한 것이야말로 인문적 소양, 인문 역량입니다. 결국 은퇴 후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사회적 화두인데 바로 이 영역에서 인문학이 기여할 여지가 많습니다.

인문대 출신의 90%가 논다고요. 나는 앞으로 인간의 90%가 노는 시대가 될 거 같은데요. 일례로 무인자동차가 10년 안에 상용화될 텐데 그럼 몇백만 명은 될 관광버스와 트럭 기사가 실직합니다. 교통사고가 거의 안 날 테니 자동차 보험업도 무너지겠죠.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닥칠 일입니다.

대학 시절 지식과 스펙을 쌓는 것보다 자신의 포지셔닝에 대한 생각을 단단하게 만드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돼요. 그 힘은 독서와 여행에서 나오죠. 인문적 소양과 역량을 키우려면 책을 읽고 길을 떠나야 합니다. 여행은 길 위에서 하는 독서, 독서는 책상에서 하는 여행이죠.

밤새 한 권의 책을 읽고 나서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한 경험을 해 본 적 있나요? 단순히 어떤 정보를 얻은 게 아니라 삶에 대한 통찰력이 생긴 경험. 무협소설이 주인공이 고수를 만나 무공이 몇 단계 높아지는 것과 비슷하죠. 이 위력은 여행보다 독서가 더 셉니다. 한편 여행을 통해서는 다른 문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화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풍토의 차이에서 생기죠.

연암 박지원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다섯 살에 눈이 멀어 20년간 맹인이던 사람이 어느 날 길을 가다 눈이 번쩍 뜨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눈을 뜨고는 자기 집을 찾아갈 수 없습니다. 눈을 뜬 순간 좌표를 상실했기 때문이에요. 말 그대로 눈뜬 장님인 셈이죠. 이땐 눈을 다시 감고 지팡이에 의지해 집으로 가야 합니다. 눈을 뜨는 것 그 자체보다 개안開眼을 했을 때 자신을 컨트롤할 능력이 나에게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요즘 대학 신입생들이 꼭 이렇습니다. 엄마와 학원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해 대학에 들어와 주체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죠. 내가 누구이고, 여기가 어디인지 알려면 스스로 좌표를 설정해야 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인문학 공부입니다. 내 삶에 대한 주체성을 확보하려면 인문학을 공부해야 합니다.

백호 임제가 어느 날 술집을 나서면서 신발을 짝짝이로 신었습니다. 하인이 한쪽은 가죽신, 다른 한쪽은 나막신을 신었다고 지적했어요. 그러자 백호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말을 달리면 길 이쪽에서는 가죽신을 신었다, 저쪽에서는 나막신을 신었다고 하지 않겠느냐?” 철학적인 질문이죠. 이에 대해 연암은 정면에서 보면 신발이 짝짝이인 것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100% 옳거나 반대로 100% 그른 일은 없습니다. 정의마저도 그렇습니다. 사실은 하나이지만 진실은 하나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북한이나 IS마저도 악으로 규정하고 제거하려고만 들면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알아야 솔루션이 나와요. 저마다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할 수 있는 중간 지점을 찾아야 합니다. 짝짝이 신인 것을 알아보는 지점에 서는 통찰력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게 인문학이 할 일이기도 하고요. 테크놀로지로 해결하는 문제는 이제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이 맡을 겁니다. 결국 남는 건 인문학뿐이죠.

삶의 속도를 늦춰 보라

장차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남들이 선망하거나 안정적인 일자리는 얻기 힘들고 좋아하는 일도, 잘하는 일도 딱히 없는 게 젊은 세대 대부분이 겪는 문제입니다. 다산 정약용은 세상살이를 두 개의 축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옳으냐 그르냐 시비是非의 축, 다른 하나는 이해관계의 축이죠. 옳은 일을 하고 이익도 많이 거두는 게 가장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옳은 일을 하다 손해를 볼 수도 있고, 옳지 않은 일을 해 이익을 보기도 하죠. 대기업이 해커를 스카우트하는 건 옳지 않은 일을 한 사람으로 하여금 이익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선택할 수 있다면 충족감이 큰 일을 하세요. 경제적 보상이 적은 건 형편껏 살다 보면 길들여집니다. 이게 인문학의 가르침입니다. 교육의 목표가 창의성과 인성을 길러주는 건데 이 두 가지를 양립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삶의 속도도 더 늦춰 보세요. 삶에 대한 통찰력은 기술의 진보와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봅니다. 나의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을 적극적으로 선택해 1만 시간을 투입해 보세요. 나 자신을 투자할 만한 ‘거리’를 이렇게 젊은 날에 붙잡지 않으면 언젠가 내 삶이 황폐해질지도 몰라요. 이런 각성이 늘 함께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필재 더스쿠프 대기자 stolee@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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