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희의 비만 Exit | 살과 사랑 이야기

▲ 체형이 망가지면 옷을 입는 것도 쉽지 않다.[일러스트=아이클릭아트]
얼마 전 필자의 초등학교 동창들이 서울 근교에서 모였다. 터 잡고 강원도 철원에 사는 친구들과 서울, 수도권에 흩어진 친구들이 모처럼 갖는 모임이다. 참석자 명단을 사전에 보니 30년 넘게 보지 못한 친구들 이름도 눈에 띄었다. 대다수의 사람이 모임을 앞두고 뭘 입고 나갈까 고민한다. 방송과 강연을 하는 필자는 복장에 꽤 신경을 쓰는 편이다. 게다가 성격도 소심해 무엇을 입을지 며칠 전부터 고민하거나, 운전 중 구김이 가는 게 싫어 차에 싣고 다니다 갈아입기도 한다.

모임을 앞둔 옷 고민은 여성이 더 심한 편이다. 지천명이 넘어도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낯을 많이 가린다. 늦봄이고 실내가 따뜻해도 한 친구는 두꺼운 외투를 벗지 않는다. 살이 쪄서 창피하다는 게 이유다. 반갑다고 들이대는 셀카 또한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자신이 비만하다고 느낄수록 움츠러들고 무엇인가 회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젊은 여성들은 카메라를 들이대면 귀여운 척 볼 바람을 빼지만, 볼살이 창대한 중년 여성은 그것도 쉬운 게 아니다. 이래서야 어디 인생이 즐겁고 모임이 기다려지겠는가.

그러고 보니 필자가 남의 여자 걱정할 처지가 아니다. 취향이 까다로운 필자는 본인의 옷을 직접 고르는 편이다. 그럴 때면 내 옷만 사들고 가기 미안해 여성복 매장을 기웃거리는데 사실 남성들은 여성의 옷을 잘 알지 못한다. 특히 55나 66으로 대변되는 여성복 치수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다. 그럴 땐 주위에 아내와 비슷한 체격이 있는지 둘러본다. 비슷한 체형의 소유자가 발견되면 턱 짓으로 조심스레 가리킨다. 이전엔 다소 통통한 여성을 고르면 됐지만 이제는 많이 통통한 여성을 찾아내야 한다.

어설프게 크기를 결정짓고 계산을 하려면 점주는 결제를 뭐로 할 거냐 물어 온다. 옷값을 결정짓는 요소가 상표나 재료, 공정이 아니라 카드냐, 현금이냐에 달려 있는데 1만~2만원은 예사로 차이가 난다. 지갑에서 1만원짜리 5~6장을 척척 꺼낼 여력이 되지 않으면, 카드회사와 가맹점의 수수료를 대신 부담하는 봉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신용카드를 쓸 경우엔 가격도 제대로 깎을 수 없다. 한국인도 이런데 외국인들은 오죽하랴.

집에 와서 아내에게 옷을 입혀 보니 매장에서 마네킹이 걸치고 있던 옷이 맞나 싶다. 밝은 조명 아래 마네킹이 입고 있을 땐 정말 예뻤는데 색감도 떨어지고 자세도 잘 나오질 않는다. 남편의 성의를 봐서 뭐라 하진 않지만, 아내는 썩 표정이 좋질 않다. 끓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것은 필자가 내민 영수증이다. ‘남자가 여자 옷 사러 갔으니 바가지를 썼네’라면서 잔소리를 한다. 듣기 싫어 안방으로 도망친 후 낮에 산 내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 본다. 근육이 울퉁불퉁하고 키가 늘씬한 오빠 마네킹은 거기에 없다. 그저 그 옷을 벗겨 내 옷이라 입고 있는 후줄근한 중년만 있을 뿐이다. 
박창희 다이어트 프로그래머 hankookjoa@hanmail.net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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