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 ‘아버지의 이름’으로 눈감다
이면, ‘아버지의 이름’으로 눈감다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 호수 188
  • 승인 2016.05.03 13: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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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111

이면은 잘 싸웠지만 장시간 강적과 일합을 겨룬 탓에 피곤했다. 왼편 어깨에 입은 총상도 그를 괴롭혔다. 결국 이면은 적장의 칼에 찔려 전사했다. 이면에게 가슴을 찔려 말에서 떨어진 용천대도는 이렇게 말한 뒤 숨을 거뒀다. “아깝다, 이면이여. 진실로 장수 가문의 자제로다. 조선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니.”

 
이순신의 아들 이면이 나섰다. “오냐, 나는 이순신 장군의 셋째 아들 이면이다. 너희들에게 깨우쳐 줄 말이 있어서 왔다. 들은즉슨 너희 임금 풍신수길이 100만의 군사와 1000척의 병선이 있다 하거든 벽파진의 원한을 못 갚아서 이순신 장군의 집을 습격하고 그 가족을 해하려고 하니 그런 비겁한 야만적 계획이 어디 있겠느냐?”

적장 용천대도는 칼을 들어 이면의 머리를 엄습하였다. 이면을 어리게 본 것이었다. 이면은 적의 칼을 피하면서 적장의 왼편 옆구리를 칼끝으로 찔렀다. 적장의 왼편 옆구리에서는 피가 흘렀다.

정신을 가다듬은 적장과 이면은 어우러져 싸웠다. 이면은 공격을 버리고 수세를 취하여 적장의 칼 잘 쓰는 틈을 타서 찌를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나이 어린 적에게 먼저 옆구리를 찔린 것 때문에 연해 공격을 취하였다.

두 사람의 살기殺氣가 고조되었다. 적장은 심히 초조하지만 이면은 용하게도 적의 칼끝을 피하였다. 마침내 오락가락 50~60 회합을 싸워도 승부가 끝나지 아니하였다.

이면은 도로 공세를 취하여 칼끝을 용천대도의 머리 쪽으로 들이댔다. 이것을 본 용천대도는 일종의 공포심이 일어났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러기를 거의 일각이나 버티다가 이면의 칼끝이 용천의 가슴을 찔러 말에서 떨어졌다. 이면은 말을 달리며 또 다른 두 장수에게 화살을 쐈다.

▲ 이순신 장군은 전라도 보화도에서 후일을 도모했다. 많은 이들이 이순신을 돕겠다고 나섰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그러던 중 풀숲에 복병하고 있던 적병 하나가 돌연히 일어나 이면을 향해 총을 쏘았다. 왼편 어깨에 탄환을 맞은 이면은 말에서 떨어졌다. 적병들은 이면이 죽은 줄 알고 진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 순간, 이면은 정신을 차려 칼을 집고 일어서 공격을 했고, 적병은 이면을 에워싸고 칼로 찔렀다.

이면이 비록 용감하기는 하나 장시간 강적과 싸운 탓에 피곤했다. 또한 왼편 어깨에 총상을 입어 전신에 피가 묻고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결국 이면은 적장의 칼에 찔려 전사하고 말았다.

먼저 이면에게 가슴을 찔려서 말에서 떨어졌던 용천대도는 이렇게 말한 뒤 숨을 거뒀다. “아깝다, 이면이여. 진실로 장수 가문의 자제로다. 조선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

후일에 이순신이 고금도古今島로 진주하였을 때 이면을 살해한 적장 귀지조가 순신에게 생포되었다. 우연히도 그날 밤 이순신의 꿈에 면이 나타나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를 죽인 귀지조를 생포하셔서 그자가 진중에 있으니 아버지께서 소자의 복수를 하여 주세요.” 이순신은 꿈에서 답했다. “네가 살아서 장사였거늘, 죽었다고 어찌 적을 죽이지 못하느냐?” 이면은 “소자가 적의 손에 죽은 고로 아직 적을 겁내는 마음이 남아있고 또 유계와 명계가 길이 달라 감히 적을 죽이지 못합니다”라며 통곡한다.

크게 놀라 잠에서 깬 이순신은 포로된 적들 중에서 귀지조를 찾아내었다. 순신은 도부수刀斧手를 명하여 귀지조를 베어 면의 영을 위로하고 제문을 지어 추도회를 행하였다. 순신과 순신의 장자 회薈와 조카 분芬과 완莞이 곡하며 애통해하였다.

嗚呼 天胡不仁 我死汝生 理之常也 汝死我生 何理之乖也 天地昏黑 白日變色 哀我小子 棄我何歸 英氣脫凡 天不留世耶 余之造罪 禍及汝身耶 今我在世 竟將何依 號慟不已 度夜如年
하늘은 어이 어질지 않으신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가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햇빛도 변하는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은 것이냐? 내가 지은 죄로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살아본들 장차 누구에게 의지할꼬! 슬퍼 울부짖을 뿐이구나. 하룻밤 지내기가 일년 같구나.

정조 때 직제학 서유방徐有防이 상주하기를 “이순신의 막내 아들 면이 적을 쳐서 세 적장을 사살하고 적에게 죽음을 당했거늘 아직 표창이 없으니 실로 흠이 되는 일입니다” 하였다.

영의정 채제공蔡濟恭도 “순신이 통제사 시절에 그 아들 면이 고향 집에 있다가 적 한 부대를 맞아 적장 셋을 죽이고 본인 또한 죽으니 당시에 총각이라 참으로 충무의 아들이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후 선조는 이조참의를 증직하였다.

이때에 순천부사 우치적이 순신의 영을 받아 이정충 등 7장을 거느리고 해남읍에 들어가 적을 소탕하여 13급을 베고 치안을 유지하였다. 목포 앞에 있는 보화도는 배를 감추기 좋은 항구라 하여 이순신은 임시 가병영을 정하여 근거지로 하여 임시 관사를 건축하였다.

순신에게 은혜 베푼 선조
 
10월 24일에는 해남에서 적의 군량 322석을 우치적 등 제장이 탈취하여 수납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선전관 박희무朴希茂가 교지를 받들고 서울에서 내려와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이 수군 5000과 병선 70여척을 거느리고 강화도江華島에 왔다”면서 “진린이 남하하면 주둔할 만한 근거지를 정하여 알아 올리라”고 말했다.

이순신은 고금도(전라도 완도군 고금면)가 합당하다고 답하고 자신은 보화도에 있기로 했다. 명병이 도움이 되지 못할 거란 걸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후 이순신은 수천명 일꾼을 독려하여 병선을 신조 개수하고 군기를 정비하기에 골몰하였다. 영암군수 이종성李宗城이 군량미 1000석을 수납하였다.

진사 최준崔準이 군량미 50석을 보탰다. 영장사군관 박주생朴注生이 적 2급을 베고 오고 무안의 진사 김덕수金德秀도 군량미 50석을 보탰다. 이것이 다 자발적으로 나라를 위하여 이순신 장군을 돕기 위함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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