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112

가등청정은 울산 도산島山에 성을 쌓아 근거지를 만들고, 서생포로 나가 기장 해안에 머물러 있었다. 울산으로 내려오는 명나라 대군의 목표는 이런 가등청정을 잡는 것이었다. 풍신수길의 양아들로 자란 가등청정을 잡으면 무서워할 일본 장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날마다 수천명 일꾼을 독려해 병선을 만들고 고쳤다. 아울러 군비를 정비하는 데도 골몰했다. 영암군수 이종성李宗城이 군량미 1000석을 수납하였다. 진사 최준崔準이 군량미 50석을 보탰다. 영장사군관 박주생朴注生은 적 2급을 베어 오고 무안의 진사 김덕수金德秀는 군량미 50석을 보탰다. 자발적으로 이순신 장군을 돕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4월 11일 모친상을 당한 이후 심중으로는 상례를 지켜 어육魚肉을 입에 대지 않은 탓에 모습이 점차로 쇠퇴한다. 이순신李純信, 안위, 우치적, 송희립, 제만춘, 이언량 이하 제장들은 크게 근심하여 순신에게 형편에 따라 개소(다시 육식을 시작하는 것)를 누누이 간하였으나 순신은 불청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이 뜻을 도원수 권율에게 고했고, 권율은 선조에게 말을 올렸다. 선조는 교유서를 내렸다.

聞卿尙不從權 諸將爲悶云 私情雖切 國事方殷 古人云 戰陣無勇 非孝也  戰陣之勇 非行素氣力困憊者之所能爲 禮有經權 未可固守常制 卿其遵予意 速爲開素從權
들으니 경이 아직도 형편을 따르지 않아 여러 장수가 민망히 여긴다고 한다. 사사로운 정이 비록 간절하지만 나라의 일이 바야흐로 급하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전쟁터에서 용감하지 못하면 효가 아니라고 하였으니 전쟁터의 용맹은 소찬으로 기력이 약해서는 능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예법에도 원칙과 방편이 있나니 원칙만을 고집해서는 아니 된다. 경은 내 뜻을 따라 속히 개소하여 형편에 따라 대처하도록 하라.

▲ 가등청정은 풍신수길의 수하인물로 용맹한 장수였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선조는 어육으로 만든 진수성찬을 하사하였다. 이를 받아든 이순신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 무렵, 소사평에서 모리수원, 가등청정, 흑전장정 등 적군을 물리친 명나라 장수들은 다시 경상도 해안에 근거를 잡고 웅크린 일본군을 칠 계획이었다. 경략사 양호 이하 마귀, 해생 등 33명의 장군이 대군을 끌고 세길로 나누어 내려갔다. 중로中路의 대장은 고책으로, 군사는 1만2000인이요, 좌로左路의 대장은 이여매로, 군사는 1만3000인이었다. 우로右路의 대장은 이방춘李芳春, 해생의 군사는 1만1500인이었다.

육식 멀리하면서 전투

당시는 11월께였는데, 도원수 권율은 군사 몇명도 없이 이덕형, 통역관 송업남宋業男과 함께 양호의 진영으로 내려갔다. 충청병사 이시언의 군사 2000인과 평안병사 이경준의 군사 2000인은 이여매의 좌군에 가담했다. 경상좌병사 성윤문成允文의 군사 2000인과 방어사 권응수의 군사 200인, 경주부윤 박의장의 군사 600인은 고책의 중군에 가담했다. 경상우병사 정기룡의 군사 1000인과 방어사 고언백의 군사 300인은 이방춘의 우군에 가담하였다.

양호는 성동격서의 전략을 썼다. 전라도 순천의 소서행장을 치는 척해 행장의 발을 묶어놨다. 그러면서 길을 에둘러 경상도 울산으로 향하였다. 이는 순천의 적장 소서행장은 수군 명장 이순신에게 맡겨 두고 가등청정을 먼저 치기 위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가등청정은 사납기로 유명해 명나라 장수들이 가장 꺼리는 인물이었다. 가등청정은 본래 풍신수길이 길러낸 장수다. 아들이 없는 풍신수길이 등길랑藤吉郞 시대에 자신의 고향인 중촌에서 데려다 길렀다. 외척 형제의 아들인데다 오랫동안 길러 풍신수길이 중시했다. 가등청정을 명나라 장수들이 잡겠다고 나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등청정 하나만 잡으면 다른 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거였다.

이때 가등청정은 울산 도산島山에 성을 쌓아 근거지를 만들고, 서생포로 나가 기장 해안에 머물러 있었다. 울산으로 내려오는 명나라 대군은 경주에 이르렀다. 고책의 군사는 언양彦陽으로 나가 길목을 막았다. 이여매, 해생의 군사는 울산으로 들어가 성을 에워쌌다. 울산성은 가등청정의 부하 가등청병위가 지키고 있었다.

이때 천야행장이란 적장이 모리수원의 부하 태전정신太田政信의 무리와 함께 고책의 명군과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밤을 지냈다. 천야행장의 선봉이 새벽녘에 고개를 넘다가 명군의 대진이 산 밑에 주둔한 것을 보고 놀라서 달아나려 하였지만 천야행장은 적군을 만나 달아나는 것은 비겁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명병을 맞아 싸우다가 한 가닥 남은 혈로를 헤치고 울산성으로 쫓겨 들어갔다.

울산으로 향하는 양호

양호는 통역관 송업남, 이덕형, 권율의 무리 3~4인만 데리고 제독 마귀의 진으로 들어가서 파새 양등산을 선봉으로 삼았다. 이어 정병 3000기를 몰고 울산성 아래에 들이닥쳤다. 그 이튿날은 3로로 전진하던 명나라의 군대가 함께 전진해 좌군은 반구정伴鷗亭 보루를 에워싸고 중군은 병영을 맞부딪치고 우군은 태화강太和江 보루를 에워쌌다. 양호는 몸에 중갑重甲을 입고 독전을 했다. 모든 군사들은 북소리 높이고 함성을 지르며 공격하였는데 대포소리는 천지를 뒤흔들고 화전과 시석은 소낙비 퍼붓는 듯하여 적의 외막外幕을 다 태우고 돌진하였다. 적은 사상자가 많아서 견디지 못하여 내성으로 물러나고 외성은 명나라 군사가 점령하게 되었다.

울산성을 지키던 가등청병위는 명병에게 이렇게 곤란을 당하고 있었다. 때마침 천야행장을 맞아들여 성 안의 병사를 지휘하게 하니 명나라 장수들은 천야행장을 가등청정으로 잘못 알고 더욱 맹렬하게 공격했다. 이 와중에 명군 역시 1000여명 죽었고, 그러자 명병 역시 내성 가까이까진 들이치지 못했다. 이때 이방춘과 해생의 군사는 도산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도산성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험고한 암벽상에 새로 쌓은 옹성이었다. 해생과 이방춘의 마병馬兵이 들어가 치다가 결국은 실패하고 쫓겨 나왔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