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양적완화의 이면

▲ 지난 4일 구조조정 자금 확보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관계기관 협의체가 머리를 맞댔다. 하지만 재정과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수단을 조합해 자금을 마련하겠다는 애매한 입장을 밝히는 데 그쳤다.[사진=뉴시스]
영 미덥지 않다. 조선ㆍ해운 등 주력산업을 구조조정한다면서 어느 부문을 살리고 정리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과 산업 재편 전략이 없다.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떠들기만 하지 단호하고 일사불란하게 끌고 갈 컨트롤타워와 전문가도 보이지 않는다. 그간의 방만 경영과 부실에 대해 책임지는 기업 경영진과 채권단 인사도 없다. 

총선 이후 야당들이 이례적으로 동의하고 나서자 정부 여당이 화답하며 속도를 내는 듯 보이지만, 준비가 안 돼 있는데다 진행 과정도 어설프기 짝이 없다. 구조조정 자금 확보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관계기관 협의체가 4일 회의를 열었지만 재정과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수단을 적절하게 조합해 마련한다는 어정쩡한 입장 정리에 그쳤다.

어떤 식으로든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할 요량인데 윤전기를 돌려 얼마나 찍어낼지를 아는 이가 없다.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법인세 인상으로 구조조정 자금 5조원을 마련하자는 야당의 제안에 “5조원을 갖고 될지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 일각에선 10조원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언론에 흘리고 있다. 이 자금의 대부분은 당장 조선ㆍ해운업에 막대한 자금을 대출해주느라 부실해진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 두 국책은행의 자본을 확충하는데 투입될 텐데 정부가 모르면 어쩌자는 말인가.

정부는 그동안 ‘시장 자율 구조조정’을 내세웠지만, 산업은행ㆍ수출입은행 등 채권단은 무능과 방만 경영, 도덕적 해이를 연출하며 부실을 키웠다. 전문성이 떨어지는 정치권의 낙하산 인사도 한몫했다. 두 국책은행의 자본 확충에 앞서 그간의 방만 경영과 구조조정 지연에 대한 대주주와 경영진, 채권단의 책임 소재부터 가려야 한다.

그런 뒤 구조조정 자금이 필요하면 국회 승인을 얻어 추경예산을 편성하거나 금융안정기금을 쓰는 정공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얼마가 필요할지 모른다면서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하는 한국판 양적완화를 통해 메꾸겠다는 발상은 여소야대로 재편되는 국회의 예산 감시를 피하려는 꼼수라는 지적을 받아도 싸다.

발등에 떨어진 불인 조선ㆍ해운을 필두로 석유화학, 철강, 건설 등 정부 스스로 지목한 5대 취약 업종의 어느 부문을 살리고 정리할 것인지 명확한 기준과 처리 원칙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해당 업종의 기업들이 이 기준에 따라 자구책을 강구할 것이고, 구조조정 과정에서 필요한 지원 규모도 나오지 않겠는가.

될 만한 신산업까지 망라한 종합적인 산업개혁의 청사진 아래 구조조정 과정에 민간 전문가를 참여시키는 방안도 강구해야 한다. 국책은행과 시중은행 등 채권단이 중심이 돼 기업의 재무상태만 다듬는 구조조정으론 향후 경기 변동에 따라 언제 또다시 한계기업을 양산할지 모른다.

업종을 꿰뚫는 전문가를 참여시켜 미래의 기술과 산업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 정부는 컨트롤타워로서 큰 그림을 그리고, 채권단은 필요한 자금을 대고, 산업 및 금융 전문가 그룹이 구조조정을 실행하는 역할 분담이 요구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파산한 세계 1위 자동차업체 제너럴모터스(GM)를 회생시킨 것은 채권단이 아니었다. 미국 정부가 발탁해 전권을 맡긴 구조조정 전문가들이었다. 투자은행과 사모펀드에서 오래 일한 스티븐 래터너를 중심으로 산업 전문가 등 14명이 팀을 꾸렸다. 최고경영자(CEO) 릭 왜고너를 책임을 물어 내보내고, 10여개 브랜드를 4개로 줄였다. 그 결과, GM은 2년 만인 2010년 흑자로 돌아선 데 이어 2011년 세계시장 차 판매 1위로 복귀했다.   

1997년 외환위기는 그해 1월 한보그룹 부도로 시작됐다. 당시 정부는 한은에 2조원만 도와주면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얼마 뒤 부실은 4조원, 최종적으로 8조원으로 늘어났다. 부실 규모를 은폐하려다 일이 커진 것이다. 조선ㆍ해운 업종은 구조조정의 시작이다. 20년 전 그렇게 혹독한 경험을 하고도 이번에 또 어물댔다가는 제2의 IMF 사태에 직면할 수도 있다.
양재찬 더스쿠프 대기자 jayan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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