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암살 ❹

열혈애국청년 염석진(이정재)의 변신은 실로 극적이다. 일제의 무단통치시절이던 1911년 데라우치 조선 총독의 목숨을 노리고 경성 손탁호텔에서 ‘쾌걸 조로’처럼 복면에 망토를 휘날리며 총질을 해대던 염석진은 한순간 일본 헌병대의 앞잡이로 변신한다.

일본 밀정 염석진이 약관의 나이에 임시정부의 경무대장직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온전히 그의 손탁호텔 습격의 신화 덕이다. 당시 부상을 당해 얻은 철제 손가락은 영웅담을 웅변한다. 영웅담은 대개 구전口傳을 거치면 ‘신화’가 된다. 염석진은 그 무시무시한 종로경찰서를 탈출하고, 옆구리에 난 총구멍을 손가락으로 틀어막은 채 만주까지 탈출한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전설이 된다.

1911년 일제의 밀정으로 변신한 염석진은 영화의 배경인 1933년까지 무려 22년간 안정적으로 밀정 역을 수행했다. ‘전설적 무용담’에서 비롯된 신용이 없었다면 아마도 불가능했을 일이다. 한 차례의 화끈한 거사로 한도限度 없는 신용카드를 발급받은 셈이다. 천하의 김구 주석도 김원봉도 그를 무한 신뢰한다. 젊은 독립투사들은 그를 신처럼 받들어 모신다.

염석진이 발급받은 ‘항일의 무한신용’은 1949년 해방된 조국의 ‘반민특위’ 재판정에서도 위력을 발휘한다. 친일행적을 공격하는 검사와 방청객들 앞에서 염석진은 웃통을 벗어 재끼고 온몸에 난 6발의 총탄 상흔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자신의 항일 역사를 환기시킨다. 그러면서 “이런 내가 친일파냐”고 으르렁댄다.

늙어 쭈글거리는 온몸에 일제의 총탄 흔적이 있는 그가 친일파일 수는 없다. 그가 친일파라면 살아남은 조선인 모두가 친일파라 해도 할 말이 없다. 일순 숙연해진 재판정에서 곧이어 방청객들의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온다. 그렇게 염석진은 반민특위에서 면죄부를 받고 경찰간부들의 도열 속에 재판정을 나선다.

한도 없는 신용카드를 발급받기는 친일파 이강국(이경영)도 마찬가지다. 손탁호텔 폭파 현장에서 온몸을 던져 데라우치 총독을 보호한 이강국은 일제로부터 무한 신뢰를 받는다. 1911년 어눌한 일본말로 광산채굴권을 청탁하던 ‘중견급’ 친일파 이강국은 1933년에 이르러 일본작위를 넘본다.

그의 대저택은 일본군이 ‘황궁’처럼 호위하고, 조선주둔군 사령관과 사돈을 맺고, 자신의 딸 결혼식에 총독이 직접 참석 안 했다고 불같이 화를 낼 정도의 친일 ‘지존’으로 성장한다. 이강국에게 부여한 일제의 ‘무한 신용’은 조선주둔군 사령관 부자의 피살과 미쓰코시백화점의 대참사로 귀결된다.

리더십 이론 연구자인 에드윈 홀랜더(Edwin P. Hollander)는 ‘특별 신용(Idiosynracy Credit)이론’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사업가가 담보 없는 신용대출이 가능해야 사업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리더 역시 추종자들로부터 눈에 보이는 담보 없이도 꺼낼 쓸 수 있는 신용이 필요하다.”

1972년 중국 베이징北京을 방문해 공산국가인 중국과의 수교를 이끌어냈던 닉슨 전 대통령은 강력한 반공주의자라는 신용이 있었기에 보수반공주의자들의 의혹을 받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베이징행을 감행할 수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역시 그의 어머니가 무장공비에게 살해됐다는 신용(credit) 덕분에 그의 다소 진보적이거나 급진적인 정치노선이 ‘빨갱이 시비’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

홀랜더의 지적처럼 사업가든 지도자든 ‘신용대출’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상하이上海 임시정부가 염석진에게 부여한 것과 같은 과도한 신용은 고스란히 조직과 사회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그 신용이 임시정부의 모든 자체 검열을 무력화하기 때문이다. 그 덕에 염석진은 자유롭게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일본군에 팔아넘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때의 빼어난 업적이나 실적으로 ‘무한 신용카드’를 발급받은 어느 기업인, 각계 지도자들이 그 신용을 배신하거나 그 신용을 안고 넘어져 수많은 희생자를 낳고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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