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일의 다르게 보는 경영수업

▲ 유일호(왼쪽) 부총리와 이주열 한은 총재가 ASEAN+3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사진=뉴시스]
최근 저성장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와 여당이 ‘한국형 양적완화’를 운운하고 있다. 10년 전부터 실시된 일본의 양적완화 정책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는 점을 감안하면 ‘경제상황이 오죽하면 저럴까’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양적완화는 언제든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양적완화란 발권은행을 통해 화폐를 찍어내 통화량을 늘리겠다는 얘기다. 돈을 시장에 풀어돌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비성향 위축으로 투자가 얼어붙고 일자리가 축소되며 소득이 줄어드는 현상을 양적완화로 타개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천천히 찾아보자. 화폐ㆍ자산 등 실물은 제아무리 불황이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하늘로 증발하거나 땅속으로 꺼지는 게 아니고 오로지 따뜻한 지갑 속이나 은행에서 잠자고 있을 뿐이다. 이런 실물을 움직이는 주체는 ‘사람의 심리’다. 소를 냇가로 끌고갈 수는 있어도 강제로 물을 먹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시 말해, 소가 물을 먹지 않는 원인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라는 거다.

한국 경제가 이 지경에 이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세계시장의 공급과잉을 무시해 산업의 구조조정을 등한시했다는 점이다. 둘째, 기업의 경쟁력 및 체질 강화에 실패했다. 셋째, 재벌기업에 부富가 쏠리면서 중소기업은 절망에 빠졌다. 넷째, 부동산이 정책의 중심에 서면서 실물이 제조업으로 흐르지 않고 투기에 쏠렸다. 다섯째, 경제의 기본포석인 정치판에 대한 실망감이 커졌다. 여섯번째, 미래를 막는 어두운 그림자다.

이런 판국에 화폐를 더 공급하겠다는 전략이 가당키나 할까. 이는 병에 걸린 화초에 앞을 보지 못하는 봉사가 무작정 물을 뿌리는 격이다. 필자(김우일 전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장)는 양적완화의 후유증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대우그룹 붕괴가 양적완화의 실패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1997년 한국경제에 닥친 외환위기는 국가를 부도에 빠뜨리고 기업을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이런 비상시기를 돌파하기 위해 대부분의 기업은 자산을 내놓는 등 구조조정을 꾀했다. 하지만 대우그룹만은 다른 전략을 폈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당시)은 이럴수록 해외 수출에 매진해 달러를 벌어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수출이 대폭 신장돼 달러를 벌어올 수 있다면 팔리지도 않는 자산을 헐값에 내놓는 구조조정보단 훨씬 괜찮은 전략이었다.

당시 가장 인기가 좋은 수출제품은 자동차였고, 대우자동차는 경쟁이 심한 미국보다 유럽공산권을 신시장으로 여겼다. 그래서 대우그룹은 폴란드ㆍ체코ㆍ카자흐스탄 등 지역에 300억불(30조원) 이상을 투자해 현지공장을 건립했다. 현지 정부가 땅을 대고 우리가 공장을 투자하는 합작 방식이었다. 구조조정 대신 30조원 이상의 유동성을 퍼붓는 정책은 모험 그 자체였지만 어찌 보면 마지막 승부수였을지 모른다.

외환위기 와중이었지만 대우그룹은 1998년 회사채 30조원을 쉽게 조달해 유럽시장에 전력투구했다. 하지만 이 회사채는 금세 부메랑이 됐다. 현지 자동차 공장의 매출이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우그룹의 총부채는 가파르게 늘어났고, 파멸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대우그룹이 ‘유동성의 함정’에 빠진 거였다.

우리는 이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한국형 양적완화’로 인해 우리 경제는 언제든 유동성의 부메랑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형 양적완화’의 전제를 보수적으로 설정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 구조조정이 선행해야 한다. 둘째, 가장 필요로 하는 산업 부분에 유동성이 집중돼야 한다. 셋째, 유동성이 실물로 이어질 길목에 뿌려야 한다. 이 전제를 무시한 양적완화는 국가부채만 늘려놓을 것이다. 한국형 양적완화를 신중하게 검토해야 하는 이유다.
김우일 대우M&A 대표 wikimokgu@hanmail.net | 더스쿠프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