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소가치 잃은 명품의 몰락

▲ 콧대 높은 해외 명품 브랜드들이 지난해 가격 인하 정책을 내세웠다.[사진=뉴시스]
뛰어나거나 이름난 물건 또는 그런 작품. 명품名品의 사전적 의미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명품은 값나가는 사치품, 럭셔리 브랜드(Luxury brand)에 가깝다. 돈만 있으면 누구나 전통과 희소가치를 살 수 있게 된 거다. 그래서일까. 명품이 너무 흔해졌다. 여기를 봐도 명품, 저기를 봐도 명품이다.

‘3초 백(bag)’. 길을 걷다보면 3초에 한 번씩 볼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루이뷔통(Louis Vuitton) 가방의 별칭이다. 한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인기에 너도 나도 루이뷔통 가방을 구입해 들고 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 160년 전통의 가방이 3초에 한 번씩 볼 수 있는 대중 백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만의 명품이 아닌 모두의 명품이 되자 사람들은 이내 흥미를 잃었다. 면세점 판매순위에서 줄곧 1위를 차지하던 루이뷔통이었지만 시들해진 인기에 2013년부터 그 자리를 다른 브랜드(까르띠에)에 내줬다(신라면세점 서울점 기준). 2015년 상반기에는 아예 5위권 밖으로(6위)로 밀려났다. 롯데면세점도 상황은 비슷하다. 2010년에는 루이뷔통의 매출이 1037억원이었으나 2014년에는 909억원, 2015년 상반기에는 345억원으로 그 인기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명품 브랜드의 실상을 반영이라도 하듯 지난해 콧대 높은 해외 명품 브랜드들이 가격 인하 정책을 내세웠다. 지난해 3월, ‘노세일’을 고수하며 고가 정책을 펴던 샤넬(CHANEL)이 가격을 내리며 이른바 ‘샤넬쇼크’를 불러일으켰다. 한국ㆍ중국ㆍ홍콩 등에서 일부 제품의 가격을 21% 낮춘 거다. 가격 인하 전 제품을 구입한 소비자들은 교환ㆍ환불을 요구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샤넬 측은 지역별로 제각각이던 가격을 조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지만 신통치 않은 실적 때문 아니겠느냐는 분석이었다.

‘샤넬쇼크’ 이어 ‘구찌대란’도 일어났다. 수입 잡화브랜드 구찌(Gucci)가 지난해 5월 일부 제품을 50% 할인 판매하면서 백화점 매장 앞이 북새통을 이룬 것이다. 이에 대해 구찌 측은 ‘가격 인하’가 아니라 일부 상품의 재고 소진을 위한 시즌오프 행사이기 때문에 특별한 배경은 없다고 설명했다. 1년에 두 차례씩 진행하는 행사라는 거다. 할인폭도 본사의 방침이라고 못 박았다.

하지만 한국 내 실적을 살펴보면 이들 업체의 말이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몇몇 브랜드를 제외하곤 영 신통치 않기 때문이다. 2010년부터 최근까지 주요 명품 브랜드의 영업이익 추이를 보면 매년 감소세이며, 그 폭도 가팔라지고 있다. 구찌의 경우 2010년 431조원에서 2011년 460억원으로 매출이 늘었지만 이후 310억원, 283억원으로 앞자리 숫자가 계속 바뀌었다. 이후에는 유한회사로 전환돼 그나마도 실적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의류, 화장품, 향수 등을 아우르는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은 아예 수년째 적자다. 심지어 해마다 적자폭도 커지고 있다. 2011년에 27억원, 2012년엔 30억원이었던 손실이 2012년부터는 60억원, 64억원, 66억원을 기록하며 3년 연속 60억원대 적자 운영을 했다. 지난해 실적은 더 참담하다. 480억원의 매출을 올렸지만 137억원의 영업손실을 봤다.

추락하는 명품엔 날개가 없나

남성복 명품 브랜드인 에르메네질도 제냐(Ermenegildo Zegna)도 마찬가지다. 매년 10억원 이상씩 영업이익이 줄어들다가 아예 적자로 돌아섰다. 2011년 49억의 영업이익을 올린 후 2012년엔 25억원, 2013년엔 11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하지만 2014년부턴 손실액 규모가 커지고 있다. 2014년엔 5억원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에는 18억원으로 손실이 늘었다.

리본 모양의 바라와 말발굽 모티브의 간치니 로고로 유명한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는 또 어떤가. 역시 매년 영업이익이 크게 줄고 있다. 2010년 156억원에서 2011년 211억원으로 증가한 것 말고는 이후 계속 감소세다. 2012년과 2013년에 각각 188억원, 107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으며 2014년과 2015년엔 한자릿수가 줄어 84억원과 67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2012년과 2014년을 비교하면 2년 사이 무려 100억원 이상이 줄어든 셈이다.

▲ ‘3초 백’이라는 별칭이 생길 정도로 대중화된 루이뷔통은 인기가 시들해져 면세점 순위에서도 밀렸다.[사진=뉴시스]
아이러니한 것은 명품 브랜드 중에서도 초고가를 형성하고 있는 브랜드는 오히려 성장세라는 거다. 명품 안에서도 양극화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버킨백(Birkin bag)으로 유명한 에르메스(Hermes), 금빛 찬란한 금장 시계가 돋보이는 로렉스(Rolex)가 대표적이다. 실제로 국내시장에서도 여타 명품 브랜드들이 힘을 못 쓰고 있는 와중에 한국로렉스는 매년 성장세다. 지난해에는 전년 대비 영업이익이 386%나 뛰었다. 2011년 45억원, 2012년 74억원, 2013년 91억원을 기록한 데 이어 2014년엔 100억원대(106억원)로 올라섰다. 그러던 것이 지난해 514억원으로 훌쩍 성장했다.

서용구 숙명여대(경영학) 교수는 소비시장이 스마일커브(Smile Curve) 형태로 변모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고가시장과 저가시장은 성장하고 중간가격대 시장이 죽는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거다. “소매업태만 봐도 알 수 있다. 면세점과 청담동 명품거리는 활황이다. 저가시장인 편의점도 마찬가지다. 반면 중간가격대인 백화점은 어떤가. 영 힘을 못 쓰고 있다.” 전통의 명품 브랜드들의 실적은 저조하지만 에르메스나 로렉스의 매출이 늘고 있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점점 존재감을 잃어가는 기존의 명품 자리에는 그럼 누가 차지했을까. 이현학 한국패션협회 크리에이티브 커뮤니케이션팀 팀장은 “과거에는 상향지향 소비, 과시형 소비로 명품 소비가 이뤄졌지만 최근에는 경기불황 탓에 가성비를 추구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누가 명품을 사면 따라서 구입하거나 과시하기 위해 명품을 구입했다. 하지만 현재는 장기화되고 있는 경기불황으로 지갑을 열 수 없다보니 가성비를 따지기 시작했다는 게 이 팀장의 설명이다.

시장 내 양극화, 초고가는 오히려 성장세

의류나 잡화 등 패션이 더 이상 과시의 수단이 되지 않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고 이 팀장은 말했다. 대신 자동차나 시계에 투자를 하게 된다는 거다. 로렉스가 성장세인 또 다른 이유다. “럭셔리 중 럭셔리, 초고가 브랜드에 대한 수요는 꾸준히 있다. 그들은 불황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는 왜 나타난 것일까. 이재훈 딜로이트 컨설팅 전무는 ‘명품 시장의 현황 및 대응 전략’이라는 보고서에서 명품 소비자의 구매 행동과 채널선택 방식이 변화하고 있다고 짚었다. 전통적인 명품 브랜드들의 매출이 시들해지는 대신 개성을 앞세운 뉴럭셔리 브랜드들이 뜨고 있다는 거다. “전통의 명품 브랜드들이 대중화되면서 명품으로서의 희소성을 잃은 탓도 있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그들의 개성과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브랜드를 선택하는 소비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새로운 포지셔닝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기존에 갖고 있던 브랜드의 예술성과 전통성에 독특함이 함께 어우러지도록 포지셔닝 한다면 새로운 시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이 전무의 설명이다. 예로 든 것이 애플이다. 스마트폰 출시 당시 기술혁신과 럭셔리한 액세서리가 조합된 제품으로 포지셔닝해 전통적인 럭셔리 브랜드의 전략과 다른 방법을 택했다는 거다.

정연승 단국대(경영학) 교수도 여기에 의견을 보탰다. 그는 “디지털 시대에는 디지털을 강화하는 게 맞다”면서 “시계 브랜드의 경우 오리지널만 고집하기보다 트렌드에 맞춰 스타트워치도 같이 출시해야 디지털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소비자가 추구하는 새로운 가치에 부합하는 브랜드만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디지털 강화해야

그렇다면 소비자가 추구하는 새로운 가치란 무엇일까. LG경제연구원이 지난 2월 발표한 한 보고서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중국 소비자가 ‘대중大衆에서 소중小衆으로’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중국에서는 천편일률적인 제품보다 소비자 각각의 개성을 반영할 수 있는 취향 기반의 제품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인 베인앤컴퍼니가 ‘중국 사치품 시장’을 연구한 결과도 비슷하다. 응답자의 70%가 ‘새로운 스타일 추구’를 위해 새로운 명품 브랜드를 구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응답자의 82%는 향후 3년 내에는 기존에 구입했던 루이뷔통, 구찌 등 익히 알려진 명품 브랜드가 아닌 새로운 브랜드를 구입하겠다고 대답했다. 또, 브랜드 로고가 크게 보이는 제품에 대해서도 과하다거나(28%), 촌스럽다(18%)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구찌는 2011년에 영업이익 460억원을 기록한 이후 310억원, 283억원으로 앞자리가 계속 바뀌었다.[사진=뉴시스]
이처럼 중국 소비자가 기존의 명품 브랜드보다는 새로운 브랜드를 추구하는 성향이 짙어지면서 명품 브랜드들이 중국 시장에서 고전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루이뷔통, 프라다 등 주요 명품 브랜드의 최대 시장이었다. 하지만 2014년 처음 역성장을 한 후 지속적으로 감소세다. 중국 소비자가 선호하는 브랜드 중 하나였던 루이뷔통은 지난해 광저우廣州 등 매장 3곳을 닫았다. 루이뷔통이 소속된 LVMH(Louis Vuitton Monet Henn essy) 그룹은 2017년까지 중국내 매장 20 %를 줄인다는 계획이다. 버버리(Burber ry) 또한 4개 매장이 문을 닫았다.

여기에는 시진핑 정부의 반부패 정책으로 문화 소비가 위축된 영향도 크지만 중국 소비자의 성향이 변했다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마이클 코어스(Michael Kors)’나 MCM’ 등 기존 명품 브랜드와 달리 개성을 내세우는 브랜드들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다. 이처럼 글로벌 명품시장을 이끌던 중국 소비자들의 명품 소비가 줄어들면서 전세계적으로도 시장이 위축됐다는 분석이다.

불황과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이 늘면서 명품시장은 침체에 빠졌다. 그렇다면 불황이 끝나면 명품은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답은 반반이다. 이현학 팀장은 “불황이 끝난다면 명품 시장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하지만 단서가 붙는다. 명품을 흉내 낸 명품이 아닌 진짜 명품이라야 자리를 제대로 잡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연승 교수는 명품 브랜드의 진입과 퇴출이 자연스럽게 이뤄질 거라고 했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명품의 본래 가치인 희소성과 사용가치, 경험을 기반으로 트렌드에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래 없는 불황은 콧대 높은 줄만 알았던 명품 시장도 변화시켰다. 나름의 자구책을 마련해 위기를 돌파하려는 노력도 보이지만 당분간은 꺾인 성장세를 회복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불황에 영향을 받지 않는 고소득층이야 상관없겠지만 한푼 두푼 모아 명품 하나 구입하던 중ㆍ저소득층에게 명품은 지금으로선 소유와 사용 가치를 넘어 한낱 사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김미란 더스쿠프 기자 lamer@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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