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가 지나간 자리」

메르스 바이러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처참했다. 지난해 5월 20일 첫번째 메르스 바이러스 감염자가 나온 이후 186명이 메르스 확진판정을 받았고, 무려 1만6752명이 격리조치 됐다. 결국 38명의 고귀한 생명을 하늘로 돌려보내고 나서야 메르스 사태는 간신히 진압됐다.

「바이러스가 지나간 자리」는 당시 메르스 사태의 한가운데서 무너져버린 의료 시스템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의료인들의 증언과 고백을 담은 책이다. 도대체 “왜 메르스 감염병은 사태가 됐는지” “무엇이 바뀌어야만 제2의 메르스 사태를 예방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던 의료인 10명이 직접 ‘메르스 사태 인터뷰 기획팀’을 꾸렸다. 여기에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 작가가 의기투합했다.

이들이 인터뷰한 대상은 메르스 사태 최전방이었던 응급실 의료진과 개인병원·종합병원·공공병원의 의료진이다. 저자들은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우리나라 공공의료시스템의 부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반성하며 성찰한다.

이 책이 수록한 인터뷰는 크게 4가지 주제로 구분된다. 먼저 저자들은 초기 대응 과정을 살핀다. 지금까지 메르스 사태는 매뉴얼 부재로 인한 초기 대응 실패로 발생했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현장 의료진의 대답은 반대다. 거의 대부분 매뉴얼을 너무 잘 지켜서 문제가 일어났다는 거다. 첫번째 환자가 다녀온 바레인이 매뉴얼에 기재된 ‘중동 메르스 발생 10개국’에 속하지 않아서 메르스 의심환자로 신고 받지 않았던 게 대표 사례다.

두번째 주제는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메르스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인 의료인들의 이야기다. 생명의 고귀함을 생각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세번째 주제는 부실한 공공의료 시스템의 민낯이다. 현장 의료진의 눈에 비친 보건당국·지자체·의료기관 관계자들의 대응방식은 사실 낯설지 않다. 이들에게서 사태가 터지면 공수표를 날리며 카메라 플래시만 터뜨리다 돌아가는 무책임한 권력자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건 우연이 아니다.

마지막 주제는 환자 인권과 의료인 감염 문제다. 메르스 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어느 언론에서도 거론한 적이 없던 부분이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당국에선 메르스 확진 환자는 물론 의심 환자까지 격리조치 했다. 그러나 사람을 격리하는 사안을 놓고 우리는 그들의 인권에 침묵했다. 지금이라도 당시의 그 조치가 합당했는지 논의해봐야 한다는 얘기다. 옥시 사태가 터진 2016년 5월. 컨트롤 타워의 부재로 인한 사회재난을 반복적으로 겪고 있는 우리에게 이 책을 읽어봐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노미정 더스쿠프 기자 noet85@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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