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지각 개원 20대 국회

▲ 20대 국회의 4년 임기는 실로 중차대한 시기다. 법안 발의 건수나 늘리고 당리당략에 빠지면 곳곳이 고장난 대한민국을 고칠 수 없다.[사진=뉴시스]
20대 국회 임기가 시작되기 하루 전인 지난 5월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선 희한한 광경이 연출됐다. 법안을 접수하는 사무실 앞에서 의원 보좌관들이 줄을 섰다. 밤새 자리를 지키려고 당번을 정해 교대했다. 돗자리와 박스가 깔렸고, 침낭과 야식도 챙겨왔다. 바로 이튿날 오전 9시부터 법안을 접수하는데 20대 국회 ‘1호 법안’을 따내기 위한 행렬이었다.

1호 법안은 29일 새벽 6시에 나와 자리를 잡은 의원에게 낙착됐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접수’ 1호다. 새벽부터 나와 밤을 새우며 1호로 접수해도 상임위원회와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의원과 보좌진들이 1호 접수에 기를 쓰며 매달린 것은 1호 법안이 가지는 상징성과 홍보효과를 노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른바 1호 법안에 신경 쓰는 데에는 개별 의원이나 정당이 따로 없다. 20대 국회 첫날 국회에 접수된 안건은 모두 52개. 새누리당에서 28건, 더불어민주당에서 24건을 대표 발의했다. 그런데 몇몇 법안은 19대 국회에서 폐기된 것을 자구 하나 바꾸지 않고 재활용했다. 필요한 예산이 얼마인지 따진 비용추계서를 붙인 법안은 4건에 불과했다. 지역구 민원을 챙긴 포퓰리즘 법안 제출도 여전했다.

법안을 국회 임기 개시 첫날에 맞춰 대거 제출만 하면 뭐하나. 그중 상당수는 본회의에 상정도 되지 못한 채 폐기 처분되는 운명을 맞을 것이다. 실제로 19대 국회에서 발의된 1만5444건의 의원입법 중 9809건이 폐기됐다.

1호 법안 제출 경쟁은 19대 국회 때 본격화됐다. 4년 전 5월 30일에도 53건이 접수됐다. 15~18대 국회에선 첫날 접수 법안이 없거나 한자릿수였는데 갑자기 불어났다. 그 법안 53건 중 통과된 것은 22건에 불과했다. 그나마 원안ㆍ수정 가결은 3건에 그쳤고, 상임위에서 비슷한 내용의 다른 법안에 반영한 뒤 폐기한 ‘대안 반영 폐기’가 19건이었다. 이처럼 아니면 말고 식 법안 제출 분위기가 15대 국회에서 70%를 넘었던 법안 가결률을 40%대로 떨어뜨렸다.

각 정당이 내세우는 1호 법안 내지 우선 처리 법안은 그 당이 처한 상황 및 정체성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총선에서 2030세대의 외면으로 원내 1당을 놓친 새누리당은 청년 관련 정책을 담은 청년기본법안을 1호 법안으로 제출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와 보육대란 대책, 세월호특별법 개정안 등을 발의했다. 국민의당은 공정성장 관련 법안을 발의할 태세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스크린도어 참사로 숨진 열아홉살 청년의 가방에서 발견된 컵라면 등 유품에 가슴 아파한다. 새누리당의 1호 법안 청년기본법은 현실의 비정규직ㆍ알바 청년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더불어민주당이 제출한 법안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세월호 유가족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까.

지금 대한민국은 곳곳이 고장 나 있다. 수출이 17개월 연속 감소하고 조선ㆍ해운 등 주력산업이 휘청대며 경제가 어려울뿐더러 잇따른 묻지마 범죄와 안전사고로 사회도 불안하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에 남북관계 등 외교안보 상황마저 꼬이고 있다. 중심을 잡고 선제적인 정책을 펴야 할 정부는 존재감을 잃은 채 우왕좌왕한다. 국민의 대리인으로 새로 뽑힌 국회라도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 국회의장과 상임위원장 배정 등 원院 구성도 못한 채 시간을 보내고 있다.

20대 국회 4년(2016~2020년) 임기는 실로 중차대한 시기다. 저출산에서 비롯된 인구절벽을 극복하고, 정보통신기술(ICT)과 제조업의 융합 등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할 때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정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이런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법안 발의 건수나 부풀리고 당리당략에 빠져 국회의 책임을 방기하면 이를 나무라는 국민의 포스트잇이 국회의사당을 도배할 수도 있다.
양재찬 더스쿠프 대기자 jayan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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