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협약이 ‘돈 먹는 하마’로 전락한 이유

▲ STX조선해양이 자율협약을 통한 회생에 실패, 법정관리를 받게 됐다.[사진=뉴시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이 채권단과 자율협약을 진행 중이다. 대우조선해양도 자율협약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와중에 STX조선해양이 법정관리를 받게 됐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파산부는 이례적으로 채권단을 향해 ‘자율협약 실패’의 책임론을 꺼내들었다. 자율협약 탓에 구조조정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거다. 자율협약,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자율협약을 통한 구조조정 없이 조기에 곧바로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하고, 그 절차 내에서 자금지원을 하는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진행했다면 현재까지 투입된 자금(약 4조4000억원)보다 훨씬 적은 자금으로 효율적이고 성공적으로 구조조정을 진행했을 것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파산부가 STX조선해양의 법정관리 개시 결정과 함께 낸 보도자료 내용의 일부다. STX조선해양은 5월 27일 채권단과 자율협약(2013년 4월)을 맺은 지 3년2개월 만에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서울중앙지법은 7일 개시 결정을 내렸다.

법원의 도발에 가까운 보도자료에 채권단은 대응을 자제했다. 하지만 내심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채권단 관계자는 “STX조선해양의 부실은 전세계적인 수주 부진 때문인데, 채권단에 잘못이 있었던 것처럼 몰아가는 건 문제가 있지 않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억울할 순 있다. 하지만 그동안 채권단을 중심으로 진행하는 자율협약과 기업재무구조 개선작업(워크아웃)이 기업의 구조조정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서울지법의 주장은 지나치지 않다.

자율협약이나 워크아웃의 실효성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채권단의 정체성 때문이다. 말이 어렵지 채권단은 은행, 주로 국책은행들이다. 은행의 주요 업무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거다. 이런 맥락에서 채권단이 주도하는 구조조정에서 ‘원리금’보다 중요한 건 없다. 피구조조정 기업이 원금과 이자만 잘 갚으면 그만이다. 자율협약이나 워크아웃을 졸업한 기업의 장기 성장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이유다.

워크아웃과 자율협약의 문제를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워크아웃은 실적이 신통치 않다. 워크아웃을 졸업했다가 다시 워크아웃에 빠지거나 법정관리를 택하는 기업이 적지 않아서다. 경남기업은 2009년 이후 워크아웃을 세 번이나 거쳤지만 결국 회생하지 못하고 지난해 3월 법정관리로 들어갔다. 월드건설 역시 2009년 워크아웃에 들어갔지만 회생에 실패, 2011년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현재 회사는 껍데기만 남은 상태다. 2010년 워크아웃에 들어간 벽산건설은 2015년 4월 파산했다.

반면 쌍용건설은 워크아웃 상황에서 채권단의 매각이 7차례나 실패하다가 법정관리에 들어가고 나서 두바이투자청에 매각돼 되살아났다. 2009년 워크아웃을 진행하다 2012년 법정관리로 바뀐 풍림산업도 최근 되살아나는 분위기다.

자율협약, 불투명한 구조조정

자율협약의 문제는 더 심각하다. 기업구조조정촉진법(기촉법)이라는 법적 근거가 있는 워크아웃과 달리 법적 근거가 없다. 그러니 책임도 없고, 경영진과 어떤 조건을 주고받는지 알 수도 없다. 현재 법정관리를 받고 있는 삼부토건이 대표적인 예다. 이 회사는 2011년 5월 프로젝트 파이낸싱(PF) 투자로 발생한 부채와 지급보증에 얽히면서 법정관리가 불가피한 상황에 처했다.

하지만 그해 6월 삼부토건은 르네상스호텔(현 벨레상스호텔)을 담보로 제공하고, 7500억원의 융자를 받으면서 우리은행 등 채권단과 2년씩 총 4년간의 자율협약을 체결했다. 자율협약의 핵심은 르네상스호텔을 제값에 팔아 경영난을 해소하겠다는 거였다. 하지만 삼부토건 경영진은 공개매각이나 입찰이 아닌 수의계약에 집중했다. 매각은 실패했고, 그러는 사이 융자금 7500억원에 해당하는 이자만 5000억원가량 지불했다. 자율협약으로 경영상황이 좋아지기는커녕 악화된 거다.

이런 자율협약의 문제점은 최근 발표된 경제개혁연구소의 보고서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지난 5월 24일 경제개혁연구소는 산업은행이 채권을 보유한 99개 구조조정 기업(2015년 8월 기준)의 자료를 토대로 구조조정 방식에 따른 차이를 분석해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자율협약 기업의 자산 규모는 법정관리 기업보다 월등히 큰 것으로 나타났다. 대기업(집단)의 구조조정 방식이 대부분 ‘자율협약’이었다는 방증이다. 문제는 또 있다. 자율협약 기업의 부실은 구조조정이 공식 개시되기 이전에 상당 부분 진행된 경우가 많았다. ‘선제적 구조조정’이라는 자율협약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김상조 한성대(무역학) 교수는 “자율협약은 구조조정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면서 이렇게 지적했다. “법적 근거 없이 채권은행과 채무기업 간의 협의로 결정되는 자율협약 방식이 대기업에만 선택적으로 적용됐다. 그런데 부실 징후는 자율협약이든 워크아웃이든 법정관리든 구조조정 개시 전부터 공히 나타났다. 이는 자율협약이 업계의 주장처럼 ‘선제적 구조조정 역할’을 못했다는 방증인데, 이는 채권은행 주도의 구조조정 절차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송호연 ESOP컨설팅 대표는 “경영진(오너)의 빠른 의사결정이 필요한데 경영권을 내려놓지 않으려 욕심을 부리다 매출과 영업이익까지 다 떨어지고 결국 법정관리까지 가는 일이 많다”면서 “결국 자율협약이나 워크아웃이나 채권단이 중심이 돼서 진행하는 기업 구조조정은 성공하기 힘들다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 대우조선해양도 채권단과 자율협약을 맺을 공산이 크다.[사진=뉴시스]
채권단에 구조조정 일임 괜찮나

워크아웃이든 자율협약이든 이를 컨트롤하는 전담기구가 없다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송 대표는 “김대중 정부에서 기업 구조조정이 그래도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건 채권금융기관 간 이견을 조정할 목적으로 구성된 기업구조조정위원회가 전담기구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맥락에서 송 대표는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꼬집었다. “정부는 이번에 한시적으로 다시 만든 기촉법에서 원래 있던 기업개선작업 전담부서를 다 빼버렸다. 정부의 역할을 완전히 빼버린 거다. 정부 스스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기업 구조조정이 상시화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나. 이런 상황에서 기업의 체질을 바꿔야 하는 구조조정을 채권단에만 맡길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자를 받아 돈을 불리라고 만든 은행에 기업 살리기라는 공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라는 건 어불성설이지 않은가.”

현재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채권단과 자율협약을 진행 중이다. 대우조선해양도 자구안 마련을 통한 자율협약으로 구조조정을 진행할 공산이 크다. 자율협약으로 회생하면 다행이지만 제2의 STX조선해양 사태가 터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STX조선해양의 회생 절차에 일갈을 날린 법원의 주장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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