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집단 지정 기준 완화 논란 | 5조면 어떻고 10조면 어떠리

▲ 공정거래위원회가 대기업집단 지정기준을 5조원에서 10조원으로 상향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사진=뉴시스]
작은 골목엔 작은 가게가 많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큰 가게가 둥지를 틀었다. 이 골목을 수놓았던 작은 가게는 명맥이 끊겼다. 수요와 공급, 그리고 탐욕이 가득한 시장에 ‘룰(공정거래법)’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 룰이 대통령의 한마디로 단 44일 만에 바뀌었다. 정상적인 상황일까.

경제 활동을 운동 경기에 비유해보자.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은 운동 경기의 규칙, 이를테면 ‘룰(Rule)’이다. 룰은 경기에 참여한 모든 선수들이 정정당당하게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고 경기가 원만하게 진행되도록 돕는다. 마찬가지로 공정거래법은 기업들의 공정한 경쟁을 유도한다.

축구 경기에는 거친 태클, 업사이드, 핸들링 등의 반칙이 있다. 반칙이 적발되면 심판은 프리킥, 페널티킥, 경고, 퇴장 등의 벌칙을 부여한다. 공정거래법도 마찬가지다. 기업이 담합행위, 거래상 지위남용행위, 사업활동 방해행위 등 불공정거래행위를 했을 경우에 시정명령, 과징금, 고발 등의 벌칙을 준다.

공정거래법은 복싱처럼 체급도 정해놨다.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대기업집단) 제도다. 공정위는 계열사를 포함한 기업들의 전체 자산이 5조원을 넘으면 대기업집단으로 지정하고 특별히 관리한다. 덩치 큰 기업에 핸디캡을 적용, 문어발식 시장 장악을 막기 위해서다. 대기업 집단에 선정되면 상호ㆍ신규 출자가 금지되고 지주회사 설립이 제한되는 등 지배구조상에 제약이 가해진다. 채무보증 제한, 내부거래 공시 등 영업활동도 상시 감시를 받는다.

하지만 이 제도는 불합리하다는 지적을 숱하게 받아왔다. 자산총액 5조원을 갓 넘긴 기업이 자산총액 200조원대 재벌기업과 같은 규제를 받는 게 말이 되느냐는 논란이 대표적이다. 기업들이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되지 않기 위해 투자확대와 사업재편을 기피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대기업집단 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공정위는 ‘대기업 봐주기’라는 비판이 나올까 섣불리 개정안을 내놓지 못했고 공론화가 이뤄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최근 관련 제도 개정 작업에 속도가 붙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4월 26일 언론사 편집ㆍ보도국장 간담회에서 “대기업집단 지정은 한국에만 있는 제도로 반드시 시대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며 “카카오처럼 뭘 좀 해보려고 하는데 대기업으로 지정돼 이것도 저것도 못하면 어떤 기업이 더 크려고 하겠느냐”고 말했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카카오가 언급된 배경은 이렇다. 지난해 말 엔터테인먼트 업체 로엔을 인수하면서 대기업집단에 포함된 카카오는 인터넷은행 ‘카카오뱅크’의 출시를 앞두고 있다. 그런데 현행법상 비금융사인 카카오는 인터넷은행의 의결권 있는 지분을 4%밖에 소유하지 못한다.

이에 따라 금융위원회는 인터넷은행에 한해 비금융사 보유 가능 지분을 50%까지 확대하는 은행법 개정안을 20대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그럼에도 카카오는 ‘지분 4%의 덫’을 벗어나지 못한다. 카카오가 대기업집단에 포함돼 카카오뱅크의 지분을 4%밖에 보유할 수 없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문제를 제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놀라운 건 지금부터다. 공정위는 박 대통령의 발언 이후 44일 만에 개정안을 들고 나왔다. 지난 9일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개정해 대기업집단 지정 기준을 10조원으로 상향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그 이유로 공정위는 국내총생산(GDP), 대기업집단 자산합계, 대기업집단 자산평균 변화 등을 꼽았다.

실제로 대기업집단 자산 기준이 2조원에서 5조원으로 늘어난 2008년 이후 8년간 GDP는 49.4%, 대기업집단 자산 평균은 144.6% 증가했다. 5조원에 이를 곱하면 각각 7조5000억원(5조원×49.4%), 12조2000억원(5조원×144.6%)으로 늘어난다. 공정위는 “두 숫자의 절충점을 대기업집단 자산의 새로운 기준(10조원)으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다만 공정위는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 규제, 공시의무제도에서 만큼은 현행 5조원 기준을 유지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기업 자산이 5조원에서 10조원 사이에 분포했던 하림, KCC, 한국타이어, 코오롱, 아모레퍼시픽, 카카오, 셀트리온 등 25개사가 대기업집단에서 빠진다. 기존 65개였던 대기업집단은 28개로 급감한다.

문제는 이른바 ‘44일 시행령 개정안’이 시장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점이다. 김호균 명지대(경영정보학) 교수는 “공정거래법은 ‘독과점의 폐단은 적절히 규제한다’는 헌법 정신에 기초한 우리나라 경제의 아주 중요한 룰”이라며 “우리나라 경제 전 영역에 큰 영향을 끼치는 만큼 이 룰을 바꾸는 것에는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고민 없이 작업이 진행된 만큼 이 개정안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동주 전국을살리기국민운동본부 정책위원장은 “자산을 얼마로 높이든 일률적인 자산기준으로는 지정이 적정하느냐 등의 논란과 시비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면서 “대기업집단에서 제외된 기업들의 골목상권 침해를 규제할 방안도 없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이번 개정의 계기가 된 카카오는 이미 택시ㆍ대리운전ㆍ미용실 등 대표적인 골목상권 분야에서 스타트업과 소상공인의 영역을 잠식하고 있다. 하림 역시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된 달걀유통업종에 진출해 소상공인과 끊임없이 갈등을 빚고 있다.

“졸속 개정이 문제”

그럼에도 룰이 바뀔 공산은 상당히 크다. 시행령 개정이어서 국회 심의를 거칠 필요가 없어서다. 김호균 교수는 “어떤 게임이든 룰은 공정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며 “근본적 고민 없이 자산 기준만 덜컥 상향조정하는 건 합리적인 룰 개정이 아니다”고 꼬집었다. ‘졸속 개정’이 또 애먼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만 잡을지 모른다는 얘기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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