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비용 감소의 경제학

경조사비 지출이 줄고 있다. 불황으로 가계 살림살이가 어려워지자 인간관계를 위해 쓰는 비용을 줄이고 있는 것이다. 표면적으론 인간관계의 거품이 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엔 불황과 양극화의 어두운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다. 더스쿠프(The SCOOP)가 ‘관계비용 감소’의 경제학을 짚어봤다.

▲ 관계 유지 노력을 소홀히 하는 것은 헬조선 현상과 맞닿아 있다는 분석이다.[사진=뉴시스]

평소 인간관계가 좋기로 소문난 직장인 이진영(32)씨. 그는 거의 매주 있는 지인 결혼식 때문에 주말이 더 바쁘다. 우리나라에선 인맥보다 중요한 게 없다는 신념 아래 친분이 두텁지 않은 사람의 결혼식 초대에도 기꺼이 응해서다. 진영씨가 내는 축의금은 평균 5만원에서 10만원. 월평균 약 20만원이다. 그의 월급(세후 200여만원)의 약 10%가 축의금으로 빠져나가는 셈이다. 진영씨는 “매달 십일조를 내는 마음으로 경조사비를 지출하고 있다”면서 “요즘 들어 지인들과의 친분이 오가는 돈 5만원, 10만원으로 평가되는 것 같아 허탈한 마음이 들더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결혼식엔 절친 4명만 초대할 생각이다.

경조사비가 부담스러운 건 대기업 7년차 직장인인 성민규(35)씨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청첩장은 ‘납부고지서’와 같다. 마음이 없어도 의무적으로 내야 하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연봉이지만, 주말마다 ATM기 앞에서 한숨을 내쉬는 사정은 다르지 않다. 민규씨는 “솔직히 내 미래도 불투명한 마당에 다른 사람의 미래를 축하해줄 여유가 얼마나 있겠냐”며 “매년 연봉의 약 5%씩 경조사비로 나가고 있는데, 이제는 그 돈이 아깝다”고 말했다.

경조사비 씀씀이를 줄이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인간관계를 위해 의무적으로 지출하던 비용이 줄고 있는 거다. 당연히 불황의 영향이다. 불황이 철옹성 같던 인맥사회를 흔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국 2인 이상 가구의 올해 1분기 ‘가구 간 이전지출’은 25만127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3%(8600원)가 줄었다. 가구 간 이전지출에는 유학 중인 자녀에게 보내는 돈, 환자에 대한 송금 등이 포함되지만 경조사비의 비중이 가장 높다.

이준영 상명대(소비자학) 교수는 “경조사비 지출이 줄고 있는 건 실속형 소비가 증가하는 것과 맥이 같다”고 분석했다. 인간관계도 이젠 ‘양量’보다 ‘질質’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는 얘기다. 한두 번 얼굴 본 사이에서도 오가던 청첩장과 돌잔치 초대장이 이젠 ‘민폐’가 될 수도 있는 시대로 접어든 셈이다.

실제로 많은 한국인이 경조사비 지출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 올 4월 취업포털 사람인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직장인(1664명)의 82.8%가 ‘경조사비가 부담스럽다’고 답했다. 77.3%는 ‘경조사비를 의무적으로 낸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직장인 1인이 지출하는 연평균 경조사비는 141만7000원으로 집계됐다.

불황 탓에 경조사비 지출 감소

경조사비 지출이 줄고 있는 건 과시형 인간관계의 피로도가 증가했기 때문이란 주장도 나온다. 김경자 가톨릭대(소비자학) 교수는 “인간관계가 개인의 능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변질됐다는 걸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경조사와 경조사비費”라고 지적했다. 관례상 어쩔 수 없이 초대하고 참석하는 경조사가 많아지다 보니 ‘진심’이 있어야할 자리에 ‘봉투’만 남는 경우도 종종 나타난다는 거다.

한편에선 이런 현상 원인을 ‘불안심리’에서 찾는다. 황상민 연세대(심리학과) 전 교수는 “아무리 애를 써도 삶의 질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란 개개인의 체념이 관계 유지를 위한 노력마저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임금 불평등이 가장 심한 나라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 따르면 임금불평등(상위 10%와 하위 10% 임금격차) 지수는 2014년 3월 5.0배, 2015년 3월 5.2배, 2016년 5.6배로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국내 하위 10%의 월 임금총액은 지난해 80만원에서 멈춰 있다. 반면 상위 10%의 월 임금총액은 지난해 420만원에서 올해 450만원으로 1년 새 30만원이나 증가했다.

▲ 살림살이가 팍팍해서인지 경조사비 지출이 줄고 있다.[사진=뉴시스]
가계소득도 줄고 있다. 올해 1분기 실질소득 증가율은 전년 동기 대비 -0.2%로 지난해 4분기에 이어 2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근로소득도 0.3%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 때문인지 저임금 노동자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자료를 보면, 국내 저임금계층은 23.5%로 OECD 회원국 중 두번째로 많다. 올해 법정 최저임금 미달자는 264만명으로 수혜자(185만명)보다 42% 많다.

반면 고정지출비용은 계속 증가세다. 올 3월 기준 주거비는 전년 동기보다 10.3%나 올랐다. 같은 기간 세금(경상조세)과 사회보험료도 각각 5.1%, 3.5% 증가했다. 물가도 오름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특히 공공서비스 분야에서 물가가 치솟고 있다. 지난해 6월 서울·경기 등 수도권에서만 시내버스 요금이 150원, 지하철 요금은 200원이나 인상됐다. 여기에 각 지자체는 상하수도 요금을 단계적으로 올리고 있다.

물가는 오르고 고정비는 늘고

이 영향으로 올 5월 공공서비스 물가 상승률은 소비자물가(0.8%)의 약 두배인 2.2%를 기록했다. 2009년(2.0%) 이후 7년 만에 최고치다. ‘고소득자가 아닌 이상 불안감을 떨쳐내기 어렵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많은 이들이 경조사비를 줄이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다. 경조사비 지출 감소에 숨은 슬픈 경제학이다.
노미정 더스쿠프 기자 noet85@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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