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의 IMF vs 박씨의 글로벌 불황

▲ 젊은이들이 희망퇴직을 고민하는 건 회사가 언제 또 감원을 할지 불안해서다.[사진=뉴시스]
기업들이 인력감축에 열을 올린다. 말이 좋아 ‘희망퇴직’ 혹은 ‘명예퇴직’이지 사실상 ‘정리해고’다. 과연 그들이 홀로 설 수 있을까.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정리해고를 피하지 못해 자영업자로 살아온 김경환씨는 “그래도 그땐 자영업이라는 비빌 언덕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사라진 지 오래”라고 말했다. 수많은 직장인이 20년 전 그때처럼 허허벌판으로 쫓겨나고 있지만 상황은 더 심각하다는 얘기다.

지난해 두산인프라코어는 입사 1년차도 안 된 20대 사원에게 퇴사를 종용했다가 물의를 빚었다. 한국GM은 지난해와 올해 두차례에 걸쳐 사무직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시행했는데, 대상은 30대 초반 대리급부터였다.

국내 재계 순위 1위인 삼성그룹의 계열사도 마찬가지다. 삼성물산은 지난해 상반기 건설부문 인력 700여명을 ‘희망퇴직’으로 내보냈고, 12월에도 800여명의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물론 20~30대 대리급도 대상이었다.

삼성전기는 올해 4월부터 전 직원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았고 사원급도 포함됐다. 삼성전자는 수시 희망퇴직을 받고 있지만 신청자가 많지 않자 올해 초 1년 병가 후 복직하려던 직원이나 육아휴직자에게 희망퇴직을 권고했다. 이들 대부분은 30대다.

연령 파괴된 구조조정 광풍

기업의 인력감축은 더이상 나이순이 아니다. 희망퇴직을 한번 실시했다고 구조조정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나이도, 성별도, 경력도, 기간도 없다. “나라가 망했다던 외환위기 시절과 비교해도 더 심각한 상황”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얼마나 다를까. 실제 사례를 통해 1997년 구조조정과 2016년 구조조정을 비교해봤다.
■ 외환위기 시절 김씨 “그래도…” = 1997년 12월, 회사가 부도를 맞았다면서 ‘정리해고를 실시한다’고 통보해왔다. 그 발표 이후 임금은 체납됐다. 입사 14년차 과장으로 근무하던 김경환(가명ㆍ당시 43세)씨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한보그룹 부도사태를 맞은 국내 경제가 휘청인 건 맞지만 김씨가 다니는 회사가 어려운 건 아니었다. 그해 출시한 가전제품은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영업손실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두달 전만 해도 전 공장의 생산 라인은 잔업과 특근을 빠짐없이 해도 모자랄 정도로 공장가동률은 최대치였다.

부도의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그룹 경영진이 부실계열사를 살리기 위해 튼실한 계열사들을 담보로 은행으로부터 천문학적인 돈을 차입했는데, 부실이 더 커지면서 우량 계열사까지 휘청거린 거였다. 억울했던 김씨는 정리해고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김씨는 노동조합과 함께 파업을 무기로 ‘투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생활고가 문제였다. 김씨는 가족들 생각에 퇴사를 결심했고, 몇천만원의 퇴직금도 받았다. 여기에 서울에 간신히 마련했던 전셋집을 빼서 얻은 돈을 보태 편의점을 차렸다. 어쩔 수 없이 경기도로 생활무대를 옮겼지만 영업을 해본 사람으로서 ‘될 것 같다’는 직감이 있었다. 당시 편의점은 전국에 2000개밖에 없을 정도로 블루오션이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장사는 잘됐고, 그렇게 번 돈으로 딸의 대학교육까지 시켰다.

그는 “외환위기 시절에 구조조정을 당한 나는 편의점이라도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면서 “자영업계까지 포화상태라서 창업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 희망퇴직 고민하는 박씨 “그마저도…” = 대기업 건설사의 대리로 재직 중인 박민찬(가명ㆍ33)씨. 최근 회사가 ‘희망퇴직’ 신청을 받기 시작하면서 그는 고민이 많아졌다. 아직 회사가 직접 ‘나가라’고 통보한 건 아니지만 ‘희망퇴직’을 권고받고 자발적으로 퇴사하지 않으면 대기발령, 보직변경 등 온갖 방법으로 괴롭힌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희망퇴직’ 권고를 받지 않아도 머릿속이 말끔해지는 건 아니다. 회사가 언제 또다시 인력감축을 한다고 할지 불안해서다. 이미 회사는 두번의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또 한번의 인력감축이 내년이 될지 내후년이 될지 모르지만, 늦게 퇴사할수록 나이는 점점 많아지고 할 수 있는 선택도 더 줄어드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사표를 던질 수 있는 상황인 것도 아니다. 조금씩 갚아온 학자금 대출이 아직 1000만원이나 남았다. 고정수입이 없으면 고스란히 신용불량자 딱지를 달고 살아야 한다. 대기업에 근무했다는 경력은 있지만, 옮겨가는 기업이 인력감축을 안 한다는 보장도 없다.

1년에도 수만명의 자영업자가 문을 닫는 자영업은 더더욱 답이 아닌 듯하다. 정부는 창업을 하라는데, 엄두가 안 난다. 우리나라에서 창업을 했다가 잘못되면 파산 아니면 철창행이라는 부모님의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박씨는 “지금 상황이라면 언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다는 건 꿈같은 일”이라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암담하다”고 말했다. 그는 “대기업 정규직이 되기 위해 그동안 쏟아 부은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 쉽게 포기하기 힘들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라고 덧붙였다.

사회안전망 이야기 언제까지…

외환위기 당시 정리해고된 김씨는 “IMF가 한번의 쓰나미로 끝났다면 지금은 수시로 토네이도가 불어 닥치는 격”이라면서 이렇게 꼬집었다. “그래도 IMF 이후 2년 만에 경기는 다시 조금씩 살아났다. 그래서 편의점이든 PC방이든 노래방이든 자영업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수완이 좋으면 주식 투자나 부동산 투자라도 해서 대박을 노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기업들도 투자를 하지 않는다. 대학을 갓 졸업한 딸의 미래가 암담한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하다.”

그는 “기업이 살아나려면 인력감축은 필수라고 하면서도 기업 오너와 경영진은 늘 살아남는다는 게 IMF 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사실”이라면서 “더구나 기업이 어려울 때 공적자금은 그렇게 많이 투입하면서 쫓겨나는 직원들을 위한 안전망은 어디에도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상한 구조”라고 꼬집었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