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명량 ❺

▲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자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자도 이순신”이라고 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미국의 정치학자 마이클 왈처(Michael Waltzer)는 “은행이 강도를 당하면 강도를 비난할 일이 아니라 은행을 비난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보통사람’이라면 은행에 쌓여 있는 돈을 불현듯 갈구한다. 다만 은행의 철통경비와 처벌이 두려워 엄두를 못 낼 뿐이다. 국방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영화 ‘명량’ 은 이순신의 영웅 이야기다. 하지만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매트릭스’의 설계자는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조선의 이연(선조)이다. 명량해전이 보여주는 이순신을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은 이들이 설계한 매트릭스 속의 인물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히데요시가 은행 강도였다면 이연은 히데요시의 강도 욕구를 유발한 무능하고 무책임한 ‘조선은행’의 은행장이다. 히데요시는 조선은행의 새로운 은행장으로 취임하지 못했을 뿐 7년간 은행을 점거하고 분탕질을 하며 은행원들을 몰살하고 금고도 모두 털었다.

그러나 강도단이 물러간 후 은행장 이연을 비롯한 간부들은 모두 자리를 유지하고 임기를 채웠다. 더군다나 이연은 종신직 임기를 마치고는 ‘선조宣祖’라는 어마어마한 시호諡號까지 받는다.

임금 재위기간 중 공功이 있으면 ‘조祖’가 되고 덕德이 있으면 ‘종宗’이 된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연은 재위기간에 공이라 할 것도, 덕이라 할 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공도 없고 덕도 잃은 임금들이 죽어서 ‘연산군’이나 ‘광해군’의 이름으로 남듯 이연 역시 그의 군호君號인 ‘하성군河城君’ 정도로 역사에 남았어야 온당할 임금이다.

회사에 조그만 손해를 끼치거나 물의를 빚으면 그 사고의 자초지종을 밝히는 ‘시말서’를 쓴다. 그런데 조선 인구의 30%가 사라지는 변란에 대한 ‘시말서’나 ‘반성문’이 한 장도 없다. 임진왜란을 온몸으로 겪어낸 유성룡이 집필했다는 ‘징비록懲毖錄’이 그나마 유일한 임진왜란의 ‘시말서’에 가깝다. 하지만 그조차 전란이 끝난 뒤 50년이 흐른 1647년에야 간행됐다. 물론 위정자들은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 ‘징비록’은 조선에서 무관심이었지만 오히려 일본에서 인기였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유성룡의 시말서 ‘징비록’은 일본에서 더 인기였다. 출간(1695년) 당시 일본의 ‘베스트셀러’로 기록됐을 정도다. 일본인들은 히데요시가 ‘대륙정복’이라는 큰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임진왜란을 ‘용두사미의 전쟁’이라 불렀다. 금고를 털린 은행장과 간부들은 반성도 하지 않는데, 금고를 털려 했던 강도단은 절치부심 반성하고 연구한다.

‘명량’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조진웅)라는 인물은 흥미롭다. 한산도 해전에서 이미 이순신에게 한차례 호되게 당했던 와키자카는 줄곧 “이순신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며 해적 출신 구루지마와 충돌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돌아간 와키자카는 패전의 ‘시말서’도 남긴다 “이순신은 침착했고 나는 성급했으며, 이순신의 전술을 치밀했고 나의 전술을 단순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자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자도 이순신이다. 가장 죽이고 싶은 자도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나눠 마시고 싶은 자도 이순신이다.”

우리는 임진왜란을 당하고도 끝없이 상대를 무시하고 반성도 게을리 해 결국 ‘오랑캐’들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하지만 적들은 상대의 ‘뛰어남’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부족함을 반성했다. 결국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과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집요한 ‘대륙의 꿈’을 실현한다. 당시 일본해군 제독이었던 도고 헤이하치로는 “나를 영국의 넬슨 제독과 비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감히 이순신과 비교하는 것은 당치 않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적에게서도 배울 것은 배우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저들의 자세가 부럽고 또 한편으로는 두렵다. 우리는 지금도 되풀이되는 안팎의 숱한 변고變故들 속에서 무엇을 인정하고 무엇을 배우고 있는 것일까.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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