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122

명나라 군사들은 뇌물에 약했다. 뇌물을 너무 많이 받은 유정은 일본군과 아예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특히 소서행장이 유정을 많이 이용했다. 본국으로 가고 싶었던 소서행장은 유정에게 수차례 뇌물을 보내 ‘길을 열어달라’고 애원했다. 유정은 허락했지만 뒤에는 순신이 있었다.

전라도 바다의 조수는 급히 빠지기로 유명해서 주의하지 아니하면 으레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이순신은 진린에게 소선을 보내어 “조수가 나갈 때가 되었으니 군을 거두라”고 경계를 주었다. 그래도 진린은 불타오르는 듯한 탐공심에서 설마설마하면서 순신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과연 순신의 말대로 명나라 전선 중에 호선號船이란 배 20척과 사선沙船이란 배 9척이 풀에 올라앉아 버렸다. 이것을 보고 소서행장, 종의지의 군사는 순신에게 패한 분풀이로 작은 배로 뛰어올라가 명군을 죽여 버리고 배에는 불을 놓았다. 이순신은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소전선 7척을 보내어 구원하였으나 물이 얕아져서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안골포만호 우수禹壽가 탄환에 맞았다. 중상은 아니었지만 이 광경을 보고 진린은 자기의 군사는 실패하고 순신의 군사는 승리한 것 같아 분노하였지만 그렇다고 감히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이튿날인 1598년 10월 4일 이순신은 공격을 계속하여 적선 20척에 파멸적 대타격을 입혔다. 적군은 허둥지둥하다가 도주하였지만 진린은 보고만 있었다. 6일에 도원수 권율이 순신에게 비밀서간을 보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명제독 유정과 적장 소서행장의 사신이 왕래하고 있다. 부유현에서도 퇴각하려 한다.” 이순신은 이 서간을 보고 그날 일기에 ‘통분통분痛憤痛憤’이라고 썼다.

이날엔 또다른 소식도 전해졌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치는 데 성공한 변경남邊敬男이란 이가 와서 이렇게 고했다. “풍신수길은 이미 죽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다투는 사람이 많다. 부산•울산•양산의 적진이 거두어서 들어갔다.” 이튿날인 7일에 유정의 군관이 진린의 진중에 와서 유정의 패문을 올렸다. “육군은 잠시 순천에서 퇴각하고 다시 정리하여 싸움에 나아간다”고 쓰여 있었다.

뇌물 받느라 바쁜 유정

▲ 이순신은 소서행장의 군대에 맹공을 가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어찌 됐든 순신은 진린을 데리고 고금도 본영으로 돌아왔다. 순신이 고금도로 간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물때가 조감潮減이 되어서 싸우려야 싸울 수 없었다. 둘째, 순신이 왜교 해문(육지와 육지 사이에 끼여 있는 바다로 이어지는 통로)에 없으면 소서행장의 긴장이 풀려 원병을 청하지 않을 공산이 컸다. 셋째, 명의 장수 진린이 장도에 오래 있으면 소서행장의 뇌물에 현혹될 수 있었다. 넷째, 본영으로 돌아가 최후 일전을 결행할 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이때 명 육군제독 유정은 부유에서 또다시 순천으로 퇴각하였다. 소서행장으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은 터. 싸울 의사가 있을 리 없었다. 뇌물 중에는 일본 미녀 1인도 있었다고 한다. 유정의 군사는 재물로 물러가게 했지만 소서행장은 본국으로 돌아갈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소서행장이 유정에게 뇌물을 보내면서 애걸하다시피 말하였다. “지금부터는 싸우지 않고 우리는 돌아갈 터이니 길을 빌려 달라.” 뇌물을 받은 유정은 대번에 허락하고 수군제독 진린에게 “소서행장의 군사가 돌아갈 길을 빌려 달라”고 통지를 하였다.

이 무렵, 접반사 좌의정 이덕형의 비밀서간이 순신에게 왔다. 그 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적장 소서행장이 형세가 갈수록 곤란하거늘 유정이 간첩을 보내어 도망갈 길을 몰래 알려 주었다 하오. 그 상황을 알게 되어 통고하니 이순신공은 주요 항구에 복병을 두어 대파하시오. 또한 이순신공의 막하 제장 중 누가 대장감이오? 마땅히 나라를 위해 추천하기로 작정하고 있소.”

순신은 “잘 알겠다”고 답을 하면서 대장이 될 만한 자격을 품은 장수로는 이순신李純信과 유형을 추천했다.

유정이 조선에 나와 싸움은 한번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는 돈만 많이 챙겨 큰 재물을 가지고 난리가 끝난 뒤에 ‘길림의 건주호를 치라’는 명 황제의 조칙을 받고 요동으로 들어갔다. 건주의 추장인 청태조 노이합적은 유정에게 뇌물을 주고 아무 날에 항복하겠다고 애걸하였다. 뇌물로 치부한 유정은 좋아서 허락하고 준비를 소홀히 하였는데, 그날 밤에 습격하여 유정을 베고 재물을 모두 가져가 버렸다. 이것을 보라. 뇌물을 탐하면 뇌물에 죽는 결과를 짓는 것이었다.

순신과 진린의 무서운 협공
 
1598년 11월 9일 순신은 진린과 함께 전함대를 몰고 고금도 본영을 떠나 좌수영으로 왔다. 그는 인연이 깊은 여수 강산을 바라보며 비창한 마음으로 하루 이틀을 머무르다가 11일에 배를 띄워 유자도柚子島에 도착, 진을 쳤다. 이번 보름의 조수를 타서 왜교의 적선을 총공격할 계획이었다. 순신의 충의와 절개에 감화를 받은 진린은 이번만은 힘을 다하여 공격하기를 다짐하였다.

13일 적선 10척이 장도 밖으로 나오는 것을 순신과 진린이 협력하여 격파하고 진지를 장도로 옮겼다. 유정으로부터 ‘길을 빌려주겠다’는 답을 받은 소서행장의 10척의 배는 유정이 그렇게 한 줄로만 알고 묘도 앞바다를 지나갔다. 하지만 기다리던 순신과 진린의 수군의 공격에 전멸하고 말았다.

소서행장은 분이 나서 명나라 포로 40명을 결박하여 앉히고 포로 두명의 팔뚝을 끊어 명군 쪽에 보냈다. “너희 명나라 장수들이 우리를 속여 오기를 몇해나 하였느냐? 이번에도 또 속이니 내가 가지 않고 기어코 사생결단을 하더라도 싸움을 속행하겠다.”
정리 |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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