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짜 계열사 매각의 손실계산서

▲ 현대상선을 살리려 현대증권을 매각한 현대그룹에 더 큰 위기가 올 거라는 지적이 많다.[사진=뉴시스]
기업 재무구조 개선엔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부실사업을 정리하는 거고, 다른 하나는 자산을 매각하는 거다. 자산매각은 비영업부문부터 영업부문 순으로, 비우량자산부터 우량자산 순으로 하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국내에선 툭하면 우량계열사가 팔려나간다. 그렇다고 알짜 수익을 남기는 것도 아니다.

“자산을 매각할 때는 비싸게 팔아야 한다. 하지만 국내 기업들은 위기가 닥쳤을 때 현금 확보 수단으로 매각하다보니 제값을 못 받는다. 어떨 때는 잘 팔았다고 해도 매각대금으로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 그러니 남아 있는 계열사들은 또 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알짜 계열사를 판 명분이 없어지는 셈이다.” 한 인수ㆍ합병(M&A)전문가의 설명이다. 

최근 상당수 대기업이 ‘구조조정’이라는 미명으로 우량계열사를 내다 팔고 있다. 문제는 전문가들의 지적처럼 매각 과정에서 우량계열사들이 제값을 못 받고 팔려나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우량계열사를 매각한 이후 남은 그룹 계열사들의 현금흐름이 막혀 위기가 되풀이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왜 전문가들의 조언이 먹혀들지 않는 걸까. 몇가지 사례부터 살펴보자.

지난 5월 삼부토건은 자회사 벨레상스호텔(옛 르네상스호텔)을 중견건설사 브이에스엘코리아에 매각했다. 벨레상스호텔 매각은 현재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밟고 있는 삼부토건 M&A의 핵심이다. 공매로 진행된 이 호텔의 가격은 6900억원. 삼부토건이 변제해야 하는 채권 총액이 약 5000억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매각 대금은 대부분 삼부토건의 채무변제에 쓰일 예정이다.

하지만 벨레상스호텔 매각은 최근 부실계열사를 지원하다 헐값에 팔린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삼부토건은 부동산개발 사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채무보증을 섰는데, 결국 채무를 감당하지 못하자 2011년 6월 자회사인 벨레상스호텔을 담보로 맡기고 채권단과 자율협약을 맺었다. 벨레상스호텔은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더구나 이 호텔은 담보로 잡히기 전까지 10년간 단 한차례의 손실 없이 연평균 245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냈다. 2010년 기준 보유 현금만 해도 400억원에 달했다. 알짜기업이었다는 얘기다. 약 1조8000억원이던 이 호텔의 최초 입찰가격이 매각 진행 후 고작 일주일 만에 부지와 건물의 시중 가격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헐값매각 논란이 불거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기업인 삼부토건이 살아난 것도 아니다. 현재 모기업은 법정관리 상태다.

툭하면 알짜 계열사 파는 기업들

지난 4월 이뤄진 현대그룹의 현대증권 매각 역시 부실계열사인 현대상선을 살리기 위한 방편이었다. 매각 금액은 1조1000억원 수준으로 나름 제값을 받았다는 평가다. 현대증권의 순자산가치가 약 7500억원임에도 높은 값에 팔릴 수 있었던 건 현대증권이 알짜 계열사이기 때문이다. 현대증권은 지난해 영업이익 4조2672억원, 당기순이익 2795억원을 올렸다.

하지만 현대증권이 살린 현대상선은 곧 현대그룹 품을 떠난다. 지난 15일 현대상선이 대주주 지분 추가 감자를 확정하면서 현대그룹의 지분율이 급격히 줄어서다. 현대상선의 청산을 막기 위해 현대그룹으로서는 최후의 수단까지 동원한 셈이지만, 알짜 계열사였던 현대증권의 이탈로 이후 현대그룹이 더 큰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는 지적도 많다. 자산 감소로 중견그룹으로 전락할 뿐 아니라, 현대그룹의 버팀목도 현대엘리베이터밖에 남지 않아서다.

때로는 기업의 성장전략에 따라 알짜 계열사의 운명이 바뀌기도 한다. 지난 6월 대한제당은 키움증권과 TS저축은행 주식 매각을 위한 양해각서를 맺었다. TS저축은행은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3년간 매출액은 조금씩 줄었지만, 영업이익은 꾸준히 늘었다. 돈 버는 알짜 계열사란 얘기다. 그러나 대한제당은 식품사업에 주력하겠다면서 TS저축은행 매각 결정을 내렸다.

대한제당의 주력사업은 전체 매출의 20%를 차지하는 사료사업이다. 반면 시장점유율은 3%에 그친다. 지난해에는 매출액 3979억원에 당기순손실 225억원을 기록했다. 손실 규모는 매년 커지고 있다. 일부에서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TS저축은행을 매각하는 거라면 오히려 부진한 외식사업과 사료사업을 접는 게 훨씬 낫지 않겠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본업의 미련을 버리지 못해 알짜 계열사를 정리하는 악수를 뒀다는 평가도 있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국내 사료사업 대부분을 농협이 장악하고 있고, 해외사업 특히 중국에서는 현지 업체와의 협력 없이 국내 업체가 진출해 시장 장악력을 키우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면서 “글로벌 사료시장은 매력적이긴 하지만 투자비용이 크다는 게 리스크”라고 말했다.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건 바로 우량계열사를 매각했다는 것이고, 이를 통해 획기적인 재무구조 개선이나 상시 구조조정을 못했다는 점이다. 일부는 제값을 받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왜 기업들은 우량자산부터 덜컥 내놓는 걸까.

송호연 ESOP컨설팅 대표는 “우선순위을 알고 있지만 그대로 적용하기 힘든 구조 때문”이라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자산을 매각한다는 건 그만큼 재무구조가 안 좋아졌다는 거다. 사업이 잘 안 돼서다. 그럼 부실사업부터 정리하는 게 우선이다. 다음이 자산매각을 통한 재무구조 개선이다. 이때 우량자산은 자칫하면 성장동력을 끊을 수 있어 신중해야 한다. 덜 우량한 자산부터 팔아야 한다. 문제는 덜 우량한 자산은 잘 안 팔린다는 거다. 기업의 목숨줄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 급하게 팔기 때문이다.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소들을 수시로 개선하는 구조조정이 이뤄지면 굳이 우량자산을 팔 이유가 없다.”

▲ 대우조선해양의 부실사업을 빨리 정리하기만 했어도 부실 규모는 지금보다 작아졌을 거라는 분석이 나온다.[사진=뉴시스]
경영ㆍ감시 분리, 주주권도 행사해야

평소에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재무구조 개선과 사업 정리를 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는 바람에 목전에서야 우량자산을 매각하는 우를 범한다는 얘기다. 상시적 구조조정이 잘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송 대표는 “경영과 감시가 서로 분리되지 못해 책임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일례로 대우조선해양이 부실을 키우던 루마니아 망갈리아 조선소를 빠르게 정리하기만 했어도, 경영자들이 구조조정의 책임을 후대에 미루지만 않았어도 부실 규모는 지금보다 작아졌을 거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재무구조 작업이 코앞에 닥쳐 우량자산을 매각하는 상황을 바로잡을 방법은 없을까. 강윤식 강원대(경영학) 교수는 “기관투자자가 나서서 경영진에 제동을 걸어주면 효과적”이라고 조언했다. 강 교수는 “지난 2013년에 한라그룹의 부실계열사 지원 당시 중소형 독립 자산운용사였던 트러스톤자산운용이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해 잘못된 경영관행을 바로잡은 게 단적인 사례”라면서 “기관투자자의 주주권 행사 인식 제고는 물론 주주권 행사 활성화를 위한 독립적인 제3의 전문기관 육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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