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할 게 너무 많은 대한민국 직장인 자화상

여기 몇 개의 낱말카드가 있다. 여가생활, 저축, 인간관계, 결혼, 노후준비, 내 집 마련, 출산 등…. 그중 포기할 수 있는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씁쓸하게도 고를 게 너무 많다. 부쩍 가벼워진 주머니 탓에 포기할 게 많아도 너무 많아진 2016년 대한민국 직장인의 현주소를 살펴봤다. 이름하여 ‘직장인 별곡別曲’이다.

▲ 곤궁해진 주머니 사정 탓에 개인생활을 포기하는 직장인이 많다.[사진=아이클릭아트]
# IT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한성규(가명ㆍ35)씨의 스마트폰에는 오늘도 ‘술 한잔하자’는 단체 채팅방 메시지가 뜬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못 본 척한다. 그렇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는 대학 동기들이 모여 있는 채팅방에 이름만 있을 뿐 안부조차 주고받지 않은 지 오래다. 친구들도 그에게 인사치레를 하지 않는다. 한씨는 잦은 휴학과 취업 준비로 동기들보다 취직이 늦었다. 지난해엔 전직轉職을 한 탓에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한푼 두푼 모아 이제 막 월세방을 탈출한 그에게 모임은 사치나 다름없다. 업무 외의 일로 사람을 만나는 게 낯설어진 것도 사실이다.

# 자동차 정비업체에 근무하는 직장인 2년차 이진호(가명28)씨. 그는 매달 돌아오는 월급날이 그다지 반갑지 않다. 그에게 월급은 신기루나 마찬가지다. 계좌에 스치듯 지나갈 뿐 손에 쥐어지는 게 없다. 매달 꼬박꼬박 원룸 월세로 50만원이 힘없이 빠져나가고 학자금 대출 상환도 아직 한참 남았다. 생활비에 공과금까지 내고 나면 저축은 꿈도 못 꾼다. 그뿐만이 아니다. 5년째 교제 중인 연인은 “언제 결혼하냐”면서 자꾸만 눈치를 준다. 계속 모른 척할 수 없어 얼마 전에는 긴 설득 끝에 “3년 후에 하자”고 결론을 지었다. 돈을 벌긴 버는데 쌓이는 건 없는 이상한 쳇바퀴. 다람쥐가 된 듯한 이씨는 이 쳇바퀴가 하루빨리 멈추길 바랄 뿐이다.

직장인들이 여가생활저축인간관계결혼 등을 포기하고 있다. 칠흑 같은 불황 터널의 한복판에 있는 경기 탓이다. 취업포털 잡코리아는 최근 직장인 707명을 대상으로 ‘경제상황과 직장인’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전체의 70% 이상이 ‘경제 상황이 나쁜 편(44.0%)’ ‘경기 불황으로 매우 나쁘다(30.6%)’고 답했다. ‘보통이다’ ‘좋은 편’ ‘매우 좋다’ 등 긍정적인 답변은 25.4%에 그쳤다.

열악한 경제 사정은 당연하다 여겼던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하다. 실제로 직장인들은 이 조사에서 어려운 경제 상황 때문에 ‘계획한 일을 포기한 적이 있다(85.7%)’고 답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취미여가생활(55.4%복수응답)’. 그뿐만 아니라 ‘저축(38.8%)’ ‘인간관계(36.8%)’ ‘결혼(33.0%)’도 포기했다고 답했다. ‘노후준비(31.2%)’ ‘내 집 마련(30.4%)’ ‘출산(27.4%)’도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인간관계까지 끊는 직장인들

이처럼 다수의 직장인은 현재 자신의 경제 상황을 부정적이라고 판단해 결혼과 인간관계 등을 포기하고 있다. 특히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것은 통계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통계청이 매달 실시하는 ‘인구동향’을 살펴보면 ‘출생’과 ‘혼인’이 모두 줄고 있다. 2010년에 47만171명이던 출생아 수는 지난해 43만8700명으로 3만1471명(6.7%) 줄었다. 혼인 건수는 2010년 32만6104건에서 지난해 30만2828건으로 7.1%나 줄었다. 게다가 출생률과 혼인율은 점점 하락폭이 커지는 추세다.

노후준비도 풀리지 않는 숙제다. 대부분의 직장인은 노후준비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준비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KB경영연구소의 ‘2015 한국 비은퇴 가구의 노후준비 실태보고서’에 따르면 비은퇴자의 약 84%가 노후준비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하지만 최근 1년간 불필요한 생활자금을 조정(11.5%)하거나 전문가 상담(8.5%)을 받았을 뿐 적극적인 준비는 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41.0%). 나이가 젊을수록(50대 36.3%30대 43.0%) 준비는 더 부족했다.

그렇다면 직장인들은 자신이 직면한 경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잡코리아 설문에 따르면 직장인 70% 이상이 어려운 경제를 체감하고 있지만 실상은 절반만이 ‘대응하고 있다(57.9%)’고 답했다. 이마저도 불필요한 지출을 줄인다(84.5%)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 불황이 계속되면 앞으로 포기할 게 점점 늘어날 수도 있다.[사진=뉴시스]
문제는 지금의 우울한 현실을 개선할 여력이 별로 없다는 거다. 일단 직장인들은 스스로를 저소득층이라 여기는 경향이 컸다. 직장인 1079명을 대상으로 ‘체감하는 소득계층’에 대해 조사한 결과 60.4%가 ‘저소득층’이라고 답했다. 중산층은 38.6%, 고소득층이라고 답한 이들은 1.0%밖에 되지 않았다. 30대 직장인(63.4%)이 20대(56.6%)나 40대(59.0%)보다 특히 그런 경향이 컸다. 그런가 하면 스스로 저소득층이라고 답한 직장인들의 월 평균소득 규모는 174만원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직장인 10명 중 6명은 평균 174만원을 받고 있다는 얘기다.

여유 없는 현재 삶에 불만족

직장인들은 삶에 대한 만족도도 낮았다. 절반 이상(62.5%)은 현재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답했다. 이들은 또 ‘여행을 다닐 시간적금전적 여유(56.7%)’가 있어야 삶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고용 불안감이 없는 안정적인 직장(55.0%)’ ‘노후 걱정이 없는 것(53.4%)’도 만족을 위한 요건이라고 답했다.

설문조사를 종합해보면, 직장인들은 악화일로를 걷는 경기 탓에 포기했던 것을 다시 누릴 수 있어야 현재의 삶에 만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역으로 말하면, 유례없는 불황이 계속되면 직장인들은 더 많은 걸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2008년 리먼 사태와 함께 찾아온 불황의 무서운 민낯이다.
김미란 더스쿠프 기자 lamer@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