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설국열차 ❺

▲ 윌포드가 제작한 견고한 ‘설국열차’도 머잖아 종말을 고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영화 ‘설국열차’의 설정은 자못 흥미롭다. 열차가 ‘예카테리나 철교’를 통과하는 1월 1일을 기점으로 꼬리칸 ‘잉여인간’들의 봉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예카테리나(Ekaterina)가 누구던가. 1770년대 ‘귀족에게는 천국, 농노에게는 지옥’이라는 말로 압축되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양극화 시대를 열었던 인물이다. 남편이던 표트르(Pyotr) 3세를 쿠데타로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기막힌 여걸이기도 하다.

예카테리나 여제女帝는 석연치 않게 장악한 권력의 안정을 위해 공신功臣들과 측근 귀족들에게 ‘환심용’ 대규모 국유지를 하사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농민들이 사유지의 농노農奴 신분으로 떨어지고, 귀족 지주들의 가혹한 착취에 시달린다. 반면 귀족 지주들은 농노의 등골을 빼어 호화로운 대저택을 짓고 매일 밤 연회를 즐겼다. 이것이 바로 ‘귀족들의 천국, 농노의 지옥’이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펼쳐지는 ‘꼬리칸’과 ‘앞칸’의 광경은 예카테리나 시대 농노들과 귀족들의 그것처럼 별천지다. 꼬리칸 승객들은 개인당 한 개씩 배급된 더러운 ‘드럼통’ 속에서 단백질 한 덩어리로 하루를 생존한다. 반면 앞칸의 승객들은 수족관을 설치해 신선한 ‘사시미 요리’를 즐기고 아줌마는 사우나에서 땀을 빼고 젊은이들은 나이트클럽에서 광란의 밤을 보낸다.

이처럼 계급 구분이 극명한 설국열차에서 특히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바로 꼬리칸 승객들의 점호다. 기관총을 든 근위병들 앞에서 꼬리칸 사람들은 대여섯명씩 ‘앉아 번호’를 한다. 구구단을 할 줄 아는 근위병은 계수기 하나만 들고 있으면 된다. ‘앉아 번호’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익숙하고 한번쯤은 경험해 봤을 일이지만 외국인들에게는 낯선 모습이다.

1970년대 중동으로 파견된 우리 근로자들은 사막 땡볕 아래, 외국인 근로감독관 앞에서 일사불란하게 ‘앉아 번호’를 외쳤다고 한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인원을 파악하는 그 엽기적인 효율성에 외국인 감독관들은 감탄하며 엄지를 치켜들었다고 한다.

▲ 설국열차는 매년 1월 1일 ‘예카테리나 철교’를 통과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예카테리나 시대의 귀족들에게 농노는 사고팔고 버릴 수 있는 물건이었다. ‘앉아 번호’를 외치는 학생들이나 노동자도 하나의 개별적인 인간이 아니라 단지 머릿수로만 존재하는 물건이나 연장일 뿐이다. 연장들이 스스로 알아서 점호해 주니 관리자는 그 얼마나 기특할 것인가.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1년에 지구 한 바퀴를 도는 설국열차는 정확히 매년 1월 1일 ‘예카테리나 철교’를 통과한다. 절벽에 붙여 가설된 예카테리나 철교는 두꺼운 얼음으로 뒤덮여 있다. 1년에 한 번 그 철교를 통과할 때마다 열차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얼어붙은 빙벽을 돌파하지 못하면 열차는 파괴되고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이런 ‘예카테리나 철교’의 빙벽은 극단적인 불평등으로 양분된 사회가 주기적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위기’를 상징한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대단히 열정적이고 탁월한 통치방식으로 군림했다. 1700년대 말 이미 프랑스 혁명의 기운이 전 유럽을 휩쓰는 가운데에서도 혁명의 기운을 차단하고 굳건하게 제정 러시아 체제를 지켜나간다. 고질적인 불평등 구조는 1917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계속됐다.

‘영명하신 우리의 지도자’ 윌포드가 제작한 견고한 ‘설국열차’도 17년간 그 위태로운 ‘예카테리나 철교’의 빙벽을 뚫고 위기를 넘기며 계속 질주한다. 하지만 이 역시도 ‘귀족의 천국, 농노의 지옥’을 상징하는 ‘예카테리나’라는 이름의 철교 위에서 머잖아 그 종말을 고하고 만다.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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