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에 감지되는 불황의 증거들

꽉 막힌 고속도로. 수시간 운전대를 잡고 있던 탓에 잔뜩 피곤한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오던 친지들. 몸은 지쳐도 마음만은 풍요로웠던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고유의 명절’ 한가위가 코앞인데도 설레지 않는다. 폭염이 지나고 갑자기 불어 닥친 써늘한 가을바람처럼 온통 차가운 불황의 증거들 때문이다. 한가위, 달도 찼고 인생도 찼다.

▲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이제 옛말이다. 불황의 증거들로 다가오는 명절이 부담스럽다.[사진=뉴시스]
‘한가위’가 코앞으로 다녀왔다. 벌써부터 대형마트와 백화점 등 유통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추석 맞이 행사를 하고 있지만 예년만큼 명절 분위기가 나질 않는다. 오히려 명절이 다가오는 게 부담스러운 이들이 많다. 차례상을 준비해야 하는 주부들은 치솟는 물가가 부담이고, 직장인들은 조카들 용돈, 부모님 용돈 준비에 통장 잔고를 확인하기 바쁘다.

부담스러운 게 어디 가계뿐이랴. 수출 저조, 내수 부진으로 창고에 재고가 쌓여가는 기업들도 추석이 부담스럽긴 마찬가지다. 상여금을 주지 않자니 직원들 사기가 꺾일 거 같고, 주자니 자금 사정이 좋지 않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사이에 한가위는 점점 다가오고 있다.

■주부의 寒가위 = 31만8000원. 올 추석 대형마트에서 추석 차례상을 준비하게 될 경우 필요한 금액이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는 8월 31일 전국 17개 지역 전통시장 16개와 대형 유통업체 25개소를 대상으로 추석 차례상 차림비용을 조사했다. 그 결과, 전통시장은 전년 대비 7.5% 늘어난 22만4000원으로 집계됐고 대형 유통업체는 9.1% 상승해 31만8000원으로 조사됐다.

지난해보다 차례상 비용이 올라간 이유는 쇠고기 가격에 있다. 쇠고기는 한우 사육마릿수가 감소하면서 점점 가격이 오르고 있다. 한우 등심 1등급 100g 기준 지난해 7336원이던 쇠고기 가격은 8월 31일 8058원으로 올랐다. 쇠고기 한근(600g)을 사면 1년 전보다 4332원을 더 내야 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추석 성수기에는 도축 감소로 한우 가격이 지난해보다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 명절 성수기에 폭염의 영향까지 더해져 채소가격이 치솟았다.[사진=뉴시스]
채소류 가격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추석을 앞두고 각종 채소와 과일가격이 오르는 건 해마다 겪은 일이지만 올해는 8월 말까지 이어진 폭염의 영향이 크다. 배추는 지난해 한 포기(상품 기준)에 2892원이던 것이 8월 31일 기준 7641원으로 무려 164.2%나 가격이 뛰었다. 시금치도 비슷한 수준으로 가격이 상승했다. 1년 전에는 9094원으로 시금치 1㎏을 살 수 있었지만 올해는 155.3%나 오른 2만3215원이 필요하다. 폭염으로 작황이 좋지 않았던 탓이다. 결국 이런 요인이 모여 차례상 비용 상승을 초래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추석을 2주 앞둔 가격이다. 추석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차림 비용은 더 오르기 마련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쌀, 두부, 달걀 등은 전반적으로 공급이 원활해 전년보다 가격이 소폭 하락했다는 거다. 김동열 aT 유통이사는 “농협ㆍ수협과 지자체가 직거래장터 및 특판장을 운영해 할인판매 등을 실시할 것”이라며 “지금보다 가격이 좀 안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직장인의 寒가위 = 주부들이 장바구니 물가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면 직장인들은 추석 대비 ‘자금’을 마련하는 데 힘겨워하고 있다. 취업포털 사람인은 추석을 앞두고 직장인 1006명에게 지출 계획을 물었다. 그 결과, 직장인들은 올 추석에 전년보다 6만원 오른 평균 46만원을 지출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10만~20만원 미만을 쓸 거라는 대답이 16.2%로 가장 많았고 그 뒤를 20만~30만원(15.5%), 40만~50만원(15.2%) 지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50만~60만원 미만, 70만~80만원 미만을 계획하고 있다는 대답도 각각 8.7%, 4.5%를 차지했다.
지출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뭘까. 설문조사 결과 ‘부모님 용돈ㆍ선물’이 57.5%로 가장 많았다. 음식 마련ㆍ외식비(9.7%), 친척 용돈 및 선물(6.8%), 여행비(6.3%) 등도 그 뒤를 이었다. 이런 지출이 부담스러워서(71.6%) 아예 귀성을 포기하겠다는 답변도 19.3%나 차지했다.

박준오ㆍ이지은씨 부부는 이번 추석에 귀성 대신 여행을 택했다. 오며가며 고속도로에서 시간을 보내느니 여행이나 다녀오자는 준오씨의 제안에 명화씨가 흔쾌히 동의했다. 양가 가족들에게는 미리 양해를 구했다. 여행을 결정하고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오히려 2박 3일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남는 장사’였다. “기름값 하고 양쪽 부모님 용돈 드리고…. 그 돈이 만만치 않거든요. 경제적으로 여행 계획을 짜보니 오히려 더 적게 들더라고요. 그래서 결혼 후 처음으로 일탈을 감행하기로 했습니다.” ‘며느리’인 지은씨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괜한 스트레스를 받느니 차라리 눈치가 보이더라도 여행에서 스트레스를 풀고 오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김양미(가명ㆍ37)씨는 명절마다 부모님 용돈과 조카ㆍ친척 선물로 약 40만원을 지출한다. 올해는 회사 사정으로 상여금이 지급되지 않는다. 부담이 더 커졌다는 얘기다. “회사에서 상여금을 받으면 그 돈으로 부모님 용돈도 드리고 지인들 선물도 사곤 했죠. 이번에는 그게 없어서 조금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에요. 그래도 매번 하던 걸 안 할 수도 없고…. 선물 가격대를 낮추는 수밖에 없을 거 같아요.”

지난해 5만원 이상 선물세트가 많았던 것과 달리 올해는 5만원 미만의 실속형 선물세트가 인기인 것도 이런 상황이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다. 지난 1일 온라인 쇼핑사이트인 G마켓이 추석을 앞두고 주요 명절선물의 가격대별 비중을 조사한 결과, 5만원 미만의 치약ㆍ샴푸 등 생활용품세트와 식용유세트 등 실속형 제품(71.0%)이 주를 이뤘다. 대부분의 소비자들 역시 김씨처럼 선물을 아예 안 할 수는 없으니 가격부담이라도 줄여보자는 생각인 것이다.

“상여금 주고 싶지만…”

사람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1706개 기업 중 43.6%인 738개 기업이 올 추석에 상여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지급 여력이 부족해서(34.4%)’ ‘상여금 지급 규정이 없어서(31.8%)’ ‘선물 등으로 대체하고 있어서(27.2%)’가 그 이유다. 침체일로를 겪는 경기 탓에 상여금을 지급하기 어렵다는 거다. 반면 56.7%의 기업은 추석상여금을 지급하겠다고 답했다. 단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간극이 컸다. 대기업은 1인당 평균 146만원의 상여금이 지급될 예정인 반면 중소기업은 이에 절반도 못 미치는 평균 69만원의 상여금이 지급된다. 경기불황에도 상여금을 지급하는 이유로는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라는 답이 47.5%로 가장 많았으며 추석 비용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16.1%)‘라는 답변도 있었다.

■기업의 寒가위 = 자금 여력이 없는 건 기업들의 사정도 비슷하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추석을 앞두고 867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추석자금 수요조사를 실시한 결과 45.5%가 자금사정이 좋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지난해에 비해 자금사정이 원활하다고 답한 비율이 4.6% 감소했다. 절반에 가까운 중소기업들은 매출감소(73.9%) 때문에 자금사정이 어려운 것으로 드러났다. 경기침체로 특히 경기가 부진한 건설업종의 응답률이 높았다. 국회 국토교통위 소속 최경환 의원실(국민의당)에 따르면 올 7월까지 임금을 받지 못했다고 고용노동부에 신고한 건설근로자 수는 3만8192명이다. 전년 대비 60.3% 늘었다. 임금체불 신고 건설근로자 수는 해마다 늘고 있다. 2011년에 3만4057명이던 신고자 수는 지난해 6만3285명으로 늘었다. 체불임금 신고 금액도 1588억원에서 2401억원으로 부풀었다.

내수부진으로 인해 서비스업도 매출 감소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여기에 판매대금도 제대로 회수되지 않고(35.3%), 납품단가마저 인하(24.8%)되다보니 이중ㆍ삼중고를 겪고 있는 거다.

매출이 줄어들다 보니 금융회사를 통한 자금조달도 쉽지 않았다. 종업원 18명을 둔 경남의 한 제조업체 대표는 “보증기관, 은행 등을 통해 대출해왔으나 매출이 줄어들다보니 추가대출이 불가능하다”며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경기침체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니 다시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소연했다. 이 업체의 매출은 82억원이었다.
대전의 한 제조업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20년 넘게 연체 한번 없이 거래해왔는데 2014년에 매출이 감소했다는 이유만으로 은행으로부터 대출금을 10%씩 환원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늘어나는 청년실업자

이원섭 중소기업중앙회 정책총괄실장은 “기업의 실질적인 경영능력 대신 재무제표상에 나타난 수치로만 평가한 결과”라며 “경기변동, 기술개발 등의 이유로 일시적인 매출감소를 겪은 기업은 기술력과 성장성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의 대안은 이렇다. “은행과 기업 간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업계평판, 경영자의 경영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관계형금융’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어려운 때일수록 전향적인 태도로 중소기업의 자금을 지원해줄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

■한국경제의 寒가위 = 경영상황이 좋지 않으니 각종 지표 역시 좋을 리 없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8월 17일부터 24일까지 업종별 매출액순 600대 기업을 대상으로 기업경기실사지수(BSI)를 실시한 결과, 추석 특수와 추경 편성에 대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기준선인 100을 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망치는 지난 5월 102.3을 기록한 이후 계속 100을 하회하고 있다. 전월(89.5) 대비 소폭 상승해 95.0을 기록했지만 이는 추석 기대 효과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과거에도 추석이 있는 달의 전망치는 대부분 전월 대비 상승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기업들은 올해도 추석특수를 기대하지만 그 영향이 예년만 못할 거라고 전망하고 있다.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소비심리와 높은 재고율 탓에 영향력이 제한적일 거라는 얘기다. 제조업의 재고ㆍ출하비율(재고율)은 지난 7월120.0%로 전월대비 0.9%포인트 하락했지만 지난해 1월부터 줄곧 120%대를 기록하며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송원근 전경련 본부장은 “추석 특수를 기대해볼 법도 한데 비관적인 경기전망이 지속되고 있다”면서 “이번 추경 편성이 경기 심리 회복에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고용시장의 寒가위 = 고용시장도 여전히 차가운 얼음판이다. 특히 청년실업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7월 고용현황을 살펴보면 전체 실업률은 전년 동월 대비 2.4% 줄어들었지만 20~30대 실업자는 전년 동월 대비 3만8000명이 증가했다. 특히 20~24세 청년층의 실업률이 10.0% 증가했다. 대졸이상 실업자도 3만1000명(7.6%) 늘어났다. 하지만 40~50대 실업률이 감소하면서 전체 실업률 수치를 끌어내렸다.

지난해 1575만1000명이었던 비경제활동인구도 0.7% 늘어 1586만4000명으로 집계됐다. 이들 중 구직단념자(취업을 희망하고 취업이 가능했지만 노동시장의 문제로 일자리를 구하지 않은 자 중 1년 내 구직경험이 있었던 사람)수는 전년(48만7000명) 대비 줄었지만 올 들어 계속 증가세다. 지난 4월 41만4000명이던 구직단념자는 5월 42만명으로 소폭 증가했다가 최근  전월 대비 6.4% 늘어 44만6000명에 이르고 있다. 전국 수만명의 청년들이 추석에도 마음 편히 쉴 수 없다는 거다. 주부, 직장인, 청년 등 누구 하나 부담스럽지 않은 이 없는 추석이 성큼 다가왔다.
김미란 더스쿠프 기자 lamer@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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