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내부자들 ❷
국가란 국민들이 엘리트들에게 자신들을 책임지고 이끌어 나갈 권력을 ‘신탁信託’한 것이다. 금융회사에 자신의 피 같은 돈을 잘 관리하고 불려달라고 ‘믿고 맡긴(신탁)’것과 같다. 내 돈을 믿고 맡긴 은행이 내가 맡긴 돈으로 내 위에서 군림하며 자기들끼리 즐기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영화 속 엘리트들은 나의 전 재산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흥청망청 즐긴다. 내가 믿고 맡긴 나의 피 같은 돈을 조금이나마 늘려주겠다든지 최소한 원금만이라도 지켜줘야겠다는 일말의 고뇌도 하지 않는다.
청와대 참모들은 어떤가. 그들은 정치인 장필우의 자격이 아니라 자신들과의 지연ㆍ학연 등을 따져가며 그가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결의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필우의 모든 비리를 결사적으로 덮어야 한다. 그들을 위한 대통령을 만들려는 거다. 이강희를 좌장으로 하는 유력지 ‘조국일보’의 편집회의는 오로지 그들 개인과 신문사의 이익뿐이다. 게다가 조국일보의 최대물주인 미래자동차 오 회장의 줄도 타야 한다. 그가 원하는 대통령 후보를 밀어줘야만 한다.
재벌인 오 회장은 수시로 이강희와 장필우를 불러들인다. 더 많은 돈을 쓸어 담기 위해 궁리하고 그들에게 돈을 뿌려댄다. 경제엘리트로서 ‘국민경제’를 생각할 겨를 같은 건 없다. 오 회장이 따라주는 술잔을 무릎 꿇고 두 손으로 받으며 황송해서 어쩔 줄 모르는 청와대 사정수석 역시 민생은 안중에도 없다. 달리 말하면 국민에 대한 ‘엘리트들의 반란’이다.
1917년 소련 사회주의 혁명은 유럽사회에 충격을 줬다. 그동안 무기력한 ‘피被지배 계층’으로 존재했던 ‘대중’ 계급이 사회 전면에 부상하면서 엘리트 계층은 수세에 몰렸다. 1930년 스페인의 지성이었던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 sset)는 저술을 통해 교육받고 훈련받지 못한 대중들이 엘리트들을 공격하고 몰아내는 것을 ‘대중의 반란(The Revolt of the Masses)’이라고 경고했다.그로부터 50년 남짓 세월이 흐른 후 반대로 ‘엘리트들의 반란’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미국의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라쉬(Christopher Larsch)는 1990년대 미국의 상황을 ‘엘리트들의 반란, 민주주의의 배반’으로 정의한다. ‘대중의 반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한 엘리트들은 철저히 대중을 무시하며 점점 대중과 간극이 커졌다.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내고, 두툼한 개인연금을 들고, 사설 경비업체에 안전을 의탁하고, ‘여차하면’ 얼마든지 외국에 나가 살 수 있는 그들에게 국가와 사회, 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기대하긴 어렵다.
역사는 ‘대중’과 ‘엘리트’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간다. 지금처럼 엘리트들에 대한 견제기능이 마비되고 그 균형이 깨진다면 또 다른 ‘대중의 반란’이 올지도 모른다.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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