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내부자들 ❸

세상엔 많은 희귀병이 있다. 그중에서도 ‘레쉬-나이한 증후군(Lesch-Nyhan Syndrome)’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희귀병이다. 통증은 누구나 느끼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우리 몸이 보내는 일종의 경고다. 이를 자각하지 못한다면 치료의 기회도 없이 죽음으로 이어진다.

▲ 영화 속 그 누구도 자신의 행태에 부끄러움이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레쉬-나이한 증후군’이 몸의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희귀병이라면, 영화 ‘내부자들’에선 몸이 아닌 양심에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재벌 총수 ‘오  회장(김홍파)’이나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 대통령 후보 ‘장필우(이경영)’ 모두 상식과 양심에 어긋나는 행태를 보인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의 행태에 부끄러움이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영화 속 오 회장은 모든 죄가 드러나도 환자복을 입은 채 휠체어를 타고 당당하게 검찰에 출두한다. 대통령 후보 장필우는 돈을 받아먹고도 국회 정론관에 기자들을 모아놓고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음을 국민에게 고한다. 더 나아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음해에 굴하지 않고 전진하겠노라 선포한다. 논설주간 이강희는 또 어떤가. 그는 취조실에서 다리 꼬고 앉아 검사를 상대로 말장난을 즐긴다. 아담과 이브는 낙원에서 추방되며 무화과 잎으로 신체를 가렸다지만 이들은 젊은 아가씨들을 모아놓고 다함께 벌거벗고 변변한 무화과 잎 한장 없이 당당하게 즐긴다. 이쯤 되면 중증 ‘무통 증후군’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영화 속 그들의 모습을 우리는 영화 밖 세상에서도 익숙하게 접한다. 황당한 학력위조 사건으로 세상을 한바탕 뒤집었던 인물이 뻑적지근한 자서전을 쓰고, 대통령 수행할 시간을 쪼개 알뜰한 성추행을 했던 인사는 출판기념회를 열고 재기를 모색한다. 불륜과 거짓이 모두 들통난 누군가 역시 TV에 다시 얼굴을 내밀고 시시덕댄다. 교도소에 앉아서도 재기를 꿈꾸는 논설주간 이강희의 뻔뻔함과 닮았다.

▲ 무통증후군에 빠진 이들은 영화 밖 세상에서도 흔하게 만날 수 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그렇다면 양심의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뻔뻔함은 엘리트만의 전유물일까. 경제정책 입안자들이 걸핏하면 부르짖는 경제의 ‘낙수효과’는 종적이 묘연한데 부끄러움을 못 느끼는 뻔뻔함의 낙수효과는 우리 사회 도처에 만연하다. 경쟁만 강조하는 학교, 능력과 실적만 요구하는 조직과 집단, 1등만 찬미하고 기억하는 사회에 양심이나 인간다움은 설자리를 잃고 뻔뻔스러움만이 득세한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을 만큼’ 양심을 지키려 소망하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울 만큼’ 뻔뻔하지 못했던 윤동주가 29살의 젊은 나이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부모는 감히 자식들에게 그 길을 가라고 가르치지 못하고 대신 정주영이나 김우중 혹은 반기문을 가르친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Gresham’s law)처럼 명백한 ‘악화’인 뻔뻔함이 ‘양화’인 양심과 상식을 몰아내고 세상을 지배한다.

무한경쟁에 빠진 한국 사회에서 벌거벗고도 당당하고, 살인을 저지르고도 고개를 빳빳이 세우는 양심의 뻔뻔스러움이 최종병기가 되어간다. 영화 ‘황산벌’에서 김유신의 대사인 “강한 놈이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놈이 강한 것”이라는 논법論法은 양심이나 인간성 모두 팽개치고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것 같아 섬뜩하다. 고통(통증)이라는 인체의 경고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으면 치료의 기회를 놓치고 속절없이 죽음에 이른다. 그렇듯 양심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는 어떤 종말을 맞게 될까.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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