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끝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어지럽다. 불황의 어두운 그림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웅의 탄생을 그토록 기다리는지 모르겠다.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의 리더십을 지겹도록 다시 찾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다. 많은 독자의 요구로 시작한 ‘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의 연재를 2년여 만에 마친다. 우리는 오늘도 이순신과 같은 리더를 기다린다.

이순신은 어릴 때부터 산을 밀치고 바다를 뛰어넘는 기운을 품어서 거적巨賊 임꺽정林巨正을 한양 큰길에서 굴복시켰으며 젊을 때에는 만인이 보는 가운데 야우野牛를 차서 죽이고 권간權奸의 기세를 꺾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독서에 전념하고 출입을 자제하였다.

순신이 건원보권관으로 있을 때에 호남무변 모씨가 북도변장으로 와 있다가 친상을 당하고 분상할 때에 노자가 부족하여 갈 수가 없었다. 이 말을 들은 순신은 “내가 비록 그 사람은 잘 알지 못하나 어찌 포복지구(포복은 손과 발이 함께 간다는 말로 급히 서둘러 구한다는 뜻임. 남의 상사喪事에 힘을 다하여 도움을 이르는 말)가 없으리오”라면서 자기가 타던 준마를 기꺼이 내주었다.

이렇게 심성이 의협적이어서 순신은 호걸지사를 수하에 굴복하게 하였다. 그 평에 다음과 같이 일렀다.

公自奉甚薄 寢不解帶 色無所近 戰勝之賞 必盡散與部曲 不爲己有 每夜休士 必自理弓箭 不忘殺一人 士卒咸樂爲其用 指爲神明 誠格上下 三軍一志 臨戰忘死 此其大略也

“공(이순신)은 자기 몸을 아끼지 않아 잘 때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승전한 상은 반드시 마을에 나누어 주었고 자기가 차지하지 않았다. 밤이면 군사를 쉬게 하고 자신은 반드시 화살을 다듬었다.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이지 아니하여 사졸들은 모두 기꺼이 쓰이고자 하였으며 그들을 귀신처럼 지휘하였다. 진실로 위아래를 바로잡아 삼군의 뜻이 하나로 모여 전쟁에 나가서는 죽음을 잊었다.”

이순신 장군을 둘러싼 일화는 이밖에도 상당히 많다. 충경공忠景公 유형은 임종 무렵 자기 자제에게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이공의 신도비가 건립되기 전에는 내 묘에도 비를 세우지 마라.” 이를 본다면 당시 이순신은 휘하 제장들에게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그의 일화들

순신이 순절한 지 1년 만인 1599년 8월, 충청감사 김륵은 조정에 이런 내용의 장계를 올렸다. “임란의 일등 공신인 이순신의 곧은 충성과 의열은 우주에 빛나건만 그 처자식이 아산 바닷가 골짜기에서 거친 논밭에 노비들도 없어 관청의 노역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 상막喪幕에도 아침저녁으로 제사음식도 이어가기 어렵다 합니다. 보고 들은 바 측은함을 금할 수 없으니 그 연호잡역(집집마다 부과하던 여러 가지 부역. 연호는 연기가 나는 집이라는 뜻으로, 빈집이 아닌 사람이 사는 집, 나아가 일반 백성의 집을 말한다)이나 면제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아아, 선조의 냉박함이여. 그래서 전국방방곡곡에 이순신의 충심을 기리는 절이 지어졌다.

여수에 있는 충민사忠愍祠는 통제사 이시언이 일을 주관해 건립하였다. 통영 충렬사忠烈祠는 공의 부하이던 통제사 이운룡이 건립하였다. 해남 충무사忠武祠는 호남의 진신장보縉紳章甫가 건의입사建議立祠하니라. 남해 충렬사忠烈祠는 통제사 정익鄭이 건립하였다. 아산 현충사顯忠祠는 충청도 사림 등이 소청疏請하여 건립하였다. 통영 착량묘鑿粱廟는 통영군민이 공의 유택을 사모하여 건립하였다.
정리 |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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