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불임금 1조원의 그늘

체불임금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연 평균 1조원에 이를 정도다. 올해 체불임금은 역대 최대치를 넘어설 공산이 크다. 주목할 점은 우리나라보다 경제규모가 훨씬 큰 일본보다 체불임금의 규모가 많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일까. 전문가들은 이렇게 꼬집는다. “임금 줄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돈을 임금으로 줄 생각이 없는 것이다.”

▲ 체불임금 규모가 매년 늘어나고 있지만 정부는 뚜렷한 해결방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일러스트=아이클릭아트]

1조4196억원. 올해 체불임금 전망치다. 올 8월까지 체불액 9471억원을 기초로 추정했다. 전망대로라면 2009년 1조3438억원을 갈아치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체불임금은 2012년 1조1772억원, 2013년 1조1930억원, 2014년 1조3195억원 등으로 ‘우상향 곡선’을 그렸다. 지난해 1조2993억원으로 잠깐 주춤했지만 올해 들어 체불임금이 더 많이 쌓였다.

현재까지 피해 노동자만 21만4052명. 전년 동기 대비 12.0% 늘어난 수치다. 신고된 금액을 바탕으로 만든 통계인 만큼 신고도 못한 ‘숨은 체불임금’을 더하면 규모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올해 체불임금 규모가 늘어난 이유로 경기침체와 조선업 구조조정을 꼽는다. “기업이 어려우니까 노동자가 임금을 받지 못하는구나.” 얼핏 이런 단순한 생각이 들 법도 하다. 하지만 ‘잃어버린 20년’을 보낸 일본과 비교하면 정부의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2014년 기준 일본의 임금체불 노동자는 3만9233명, 체불액 규모는 131억엔(1440억원)을 기록했다. 체불 액수만 비교해도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10배는 많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1조3779억 달러로 일본(4조1233억 달러)의 3분의 1 수준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우리나라의 체불액이 일본의 30배에 육박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왜 일본보다 체불임금이 10배나 많은 국가가 됐을까. 전문가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난 체불임금의 원인으로 ‘솜방망이 처벌’을 꼽는다. 현행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임금체불 사업주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문제는 제재 사유를 재산 은닉이나 도주 등으로 제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체불을 하더라도 대부분 징역형이 아닌 2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받는 데 그친다. 게다가 체불임금의 일부를 주고 노동자와 합의만 하면 처벌도 받지 않는다. 법을 위반해서 얻는 이익이 제재에 따른 불이익보다 크다는 얘기다. 관리 감독이나 사전 예방에 충실한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180만개 사업장을 감독할 근로감독관은 1000여명에 불과하다. 1명이 1800개 사업장을 감독하는 식이다. 근로감독관 수가 1만7000명이 넘는 미국 등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다.

실적도 좋지 않다. 올해 체불금액 9471억원 중 근로감독관들의 지도를 통해서 해결된 금액은 4266억원에 불과했다. 비율은 45.0%로 절반이 넘는 노동자들이 신고를 하고도 체불임금을 받지 못했다는 거다. 올해 상습체불사업주로 공개된 업체와 기업인도 116명에 불과하다.

 
체불임금 규모 일본의 10배

대기업 위주의 산업 구조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우리나라는 경기에 상관없이 이윤을 챙겨가는 대기업과 그렇지 않은 영세업체의 양극화가 심각하다. 대기업이 일방적으로 납품단가 인하 등 ‘갑질’을 하면 영세업체 사업주는 노동자의 임금을 떼거나 임금을 낮추며 이윤을 챙기려 한다.

실제로 2014년 기준 100인 미만 사업장의 체불 건수는 11만6795건으로 전체 체불 건수의 97.5%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구조의 그늘에는 임금체불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업주들의 그릇된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이동주 을살리기운동본부 정책실장은 “사업주는 임금으로 줄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돈을 임금으로 줄 생각’이 없는 것”이라며 “그러니 언제나 임금 지불은 후순위로 밀려나고 우리나라 임금체불 규모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임금체불의 주된 피해자가 일용직, 비정규직, 청년 아르바이트생, 외국인 노동자 등 취약계층이라는 점이다. 올해 임금을 제때 받지 못한 청년은 4만4000명으로 전체 임금체불노동자의 20.7%나 됐다. 체불액은 940억원에 달한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체불임금

이들은 임금체불 이후의 삶도 위태롭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임금체불을 겪은 노동자 54.7%가 임금도 못 받은 채 실직자로 전락했다. 임금체불로 생계를 위협받아온 상황에서 일자리마저 잃어 이중고를 겪는 셈이다. 윤철한 경실련 국책사업감시팀장은 “정규직을 줄이고 인건비와 노동자의 권리를 뒤로 돌리는 우리나라의 후진적인 노동환경이 만들어낸 비극”이라며 “이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인 만큼 정부는 근로감독을 강화하고 임금체불 노동자를 위한 사회 안전망을 만드는 게 시급하다”고 꼬집었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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