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현 용추골미궁순대 대표

▲ 김세현 대표는 정성이 들어간 순댓국으로 전국에 40여개 가맹점을 오픈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흙수저로 태어나 은수저도 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런데 여기 시골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실함과 노력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프랜차이즈 외식 대표가 된 이가 있다. 막노동에서 시작해 순댓국집을 창업해 맛집 대열에 올라선 김세현(50) 용추골미궁순대 대표다.

어려운 집안 형편상 어머니는 서울로 돈을 벌러 나갔다. 식당 참모를 하면서 번 돈을 전북 무주에 있는 집에 보냈고, 그 돈으로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술 심부름 등 아버지의 수발을 들면서 그는 빨리 돈을 벌자는 생각밖에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거리를 돌면서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1년간 술집, 나이트 등에서 웨이터 생활을 했다. 돈도 벌었다. 하지만 20살 청춘, 버는 족족 쓰기 바빴다. 21살 군에 입대할 때  다시 빈털터리가 됐다. 군대를 제대한 후 그가 찾은 곳은 안산시 반월공단이었다. 월급은 19만원. 잠잘 곳도 없어 공장에서 숙식하며 잔업, 철야를 쉬지 않고 했다. “1년 동안 추석과 설날을 제외하고는 쉰 날이 없었죠. 돈을 벌자는 생각에 주말에도 일을 했죠.” 그렇게 해서 한달에 월급의 두 배인 40여만원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갈증이 심했다. “이렇게 벌어서 언제 돈을 모을 수 있을까 고민이 됐죠. 그런데 안산에는 공사현장이 많았어요. 한창 개발이 진행중이었죠.” 우여곡절 끝에 다세대ㆍ다가구 주택을 건설하는 현장에 책임자로 들어가게 됐다. 집이 없던 그는 현장에서 숙식하며, 특유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인근 공사현장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받고 몸값도 올라갔다. 건축으로 진로를 결정하던 시기다.

그런 그가 외식업을 택한 동기는 1997년 외환위기다. 건축 경기가 악화하면서 그는 다시 먹고살기 위해 길거리를 방황해야 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게 손님으로 북적이는 작은 순댓국집이었다. 주인에게 통사정한 끝에 두달 동안 순댓국집에서 숙식하면서 일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어냈다. 보수는 당연히 없었다. 아내와 자식이 있는 집에도 가지 못했다. 설거지, 서빙, 삶고 요리하고 다듬는 것 등을 배웠다. 이를 발판으로 1999년 보증금 1000만원 월세 55만원의 작은 순댓국집을 안산에 열었다. 오픈 이후 그는 새로운 맛 개발에 몰두했다. 영업이 끝난 후에도 주방에 홀로 남아 양념의 황금비율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정성과 노력으로 조금씩 자신만의 맛을 내는 순댓국이 만들어졌고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고객이 몰리면서 2005년 프랜차이즈 사업도 시작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신개념 순댓국으로 불리는 ‘용추골미궁순대’는 이렇게 론칭됐다. 이곳의 순댓국은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비릿함을 싫어하는 이들도 부담없이 즐긴다. 인테리어도 세련되게 꾸몄다. 젊은이들이 즐겨찾는 순댓국집으로 손꼽히는 이유다. “건강을 생각하는 정성으로 만들고 있어요. 처음 시작했던 마음 그대로 지금도 변함이 없죠. 맛이 변하면 안되잖아요.” 순댓국으로 시작한 그의 외식 인생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현재 뼈다귀감자탕을 비롯해 콩나물국밥 등 다양한 메뉴를 잇따라 선보이면서 대형 외식 프랜차이즈를 향해 내닫고 있다. 
이호 더스쿠프 기자 rombo7@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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