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론 자초한 전경련

▲ 전경련이 소수 재벌의 기득권과 정부 입장만 대변하면 국민의 공감을 살 수도, 지속 가능할 수도 없다.[사진=뉴시스]

2000년 이전까지만 해도 언론에서 경제단체들을 열거할 때 대기업 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를 맨 앞에 올리곤 했다. 단체장들이 신년사를 발표하거나 무슨 행사에 참석해 한 말씀 할 때에도 그랬다. 큰 것을 우대하는 사대事大 관행이 작용한 것이리라.

그런데 2000년 대한상공회의소가 토를 달고 나섰다. 당시 대한상의 회장인 박용성 대한체육회 명예회장이 기자간담회에서 ‘대한상의 맏형론’을 제기했다. 설립연도 등 역사로 보나, 회원기업 수로 보나 대한상의가 맏형인데 왜 전경련을 앞세우느냐고. 박 회장은 가나다 순서로 봐도 대한상의가 먼저라고 주장했다. 국제적으로 많은 국가가 갖고 있고 인정하는 단체도 상의라는 점을 덧붙였다. 언론이 일리가 있다며 대한상의를 앞세우기 시작했다.

박용성 회장의 공격적 성향을 보여주는 일화이자 전경련의 위상이 꺾이기 시작한 신호탄이었다. 이 무렵 전경련은 김우중 회장이 대우그룹 해체와 함께 물러난 뒤 회장 자리를 선뜻 맡겠다는 오너 기업인이 없어 회장 선임부터 애를 먹었다. 경제단체의 맏형 자리가 위협받고, 재계의 수장으로 불린 회장 자리가 외면당하는데도 개혁과 변신을 꾀하지 못한 전경련은 결국 외부로부터 수술 압력을 받기에 이르고 만다.

5ㆍ16 쿠데타 직후인 1961년 7월 부정축재자로 처벌받지 않는 대신 공장을 건립해 속죄하고, 단체를 만들어 정부에 협력하기로 약속하며 ‘경제재건촉진회’란 이름으로 출범한 전경련은 역대 정부와 깊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태생적 배경이 ‘정부에 대한 협력’인지라 정부의 개발사업에 참여해 경제발전과 산업화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정부가 필요로 할 때 재벌들의 돈을 모아주는 ‘수금원’ 내지 정치적 민원의 해결사 역할도 자임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퇴임 후를 위한 ‘일해재단’ 모금을 주도하고, 노태우 대선 비자금에 관여했다. 김대중ㆍ노무현 정부에선 북한에 대한 현물 지원 사업을 주도했고, 이명박 정부에선 서민을 대상으로 저금리 대출을 하는 미소금융재단 설립에 앞장섰다. 자유시장경제 창달과 국민경제 발전이란 당초 설립 목적에서 일탈하면서 정경유착과 금권정치 개입 시비를 자초했다.

전경련의 정경유착 논란은 박근혜 정부 들어 두드러졌다. 청년희망펀드 모금과 지역별 창조경제혁신센터의 산파역을 맡은 경제 분야 외에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에 대한 지지 및 홍보, 노골적인 관제 집회와 시위를 주도한 어버이연합을 편법 지원하는 정치적 활동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게다가 의혹투성이인 미르재단과 K스포츠 재단의 설립에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정치권은 물론 시민단체, 학계, 경제계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해체 압력을 받고 있다.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후보(당시)의 싱크탱크 역할을 했던 국가미래연구원까지 해산 압력 대열에 동참했다.

산업화가 급한 판에 대기업 중심 경제발전이 용인됐던 과거 개발연대와 달리 이제 경제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첨단 정보통신기술(ICT)과 제조업을 융합하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뒤지지 않으려면 대기업들만 독주하지 않고 중소ㆍ벤처기업 등 산업 생태계 구성원들이 함께 손잡고 달려야 한다.

전경련 스스로 발전적으로 해체한다는 각오로 조직을 정비하고 기능을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전경련이 모델로 삼은 일본 게이단렌經團連도 장기 집권하는 자민당 및 관료집단과 ‘어둠의 3각 유착구조’를 형성하면서 각종 비리와 스캔들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됐다. 그 결과 2002년 사용자단체인 닛케이렌日經連과 통합하면서 공익성이 강한 기구로 변신했다.

우리 전경련도 이참에 정부와 부적절한 관계를 정리하고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정경유착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대외협력 인력을 줄이고 정책연구 인력을 확충해 시장경제 발전과 신산업 육성에 부합하는 정책과 국가 미래비전을 제시하는 싱크탱크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시대적 과제인 격차해소를 위해 중소기업과의 상생, 경제력 집중 완화에 있어서도 일정 부분 역할을 맡아야 마땅하다. 소수 재벌의 기득권과 정부 입장만 대변하는 이익집단으로는 국민의 공감을 살 수도, 지속 가능할 수도 없다.
양재찬 더스쿠프 대기자 jayan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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