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다하다 발가락까지 닮아간다

“설마 외환위기 때보다 심하겠어?” 지독한 불황, 그래도 우리가 위안을 삼아왔던 말이다. 하지만 이 말도 이젠 위안이 되지 않는다. 2016년 한국경제의 주요 지표가 ‘불안한 시그널’을 울리고 있어서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16년 한국경제, 발가락까지 닮아가고 있다.

▲ 우리나라 경제의 주요 지표가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일러스트=아이클릭아트]

1997년.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 최대 국난’이라고 불리는 외환위기를 겪었다. 대기업들은 줄줄이 부도를 냈고 수많은 사람들이 실직해 거리에 나앉았다. 각종 경제 지표가 일제히 하락했고 국가신용등급은 정크등급인 ‘Baa2’까지 내려갔다. 2016년 역대 최고치의 국가 신용등급(Aa2)을 부여받은 지금의 한국 경제로서는 ‘다른 세상의 일’처럼 들린다. 국가신용등급만은 일본을 앞서 프랑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속내를 뜯어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최근 한국경제 상황이 1997년 외환위기 직전과 비슷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업의 수출 경쟁력과 채산성이 약화되고, 부채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는 점이 특히 닮았다. 외환 위기 직전엔 기업 부채가, 현재는 가계 부채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점만 다르다.

 
먼저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보자. 1998년에는 -5.5%를 기록했다. 지난해 우리나라는 2.6% 성장했으니 단순 비교로는 나쁜 성적 아니다. 올해 3분기 성장률 역시 마이너스는 아니다. 전 분기보다 0.7% 증가했다. 문제는 성장의 질質이다. 제조업이 전분기 대비 -1.0%로 역성장한 대신 건설 투자는 전분기보다 3.9% 늘었다. 부동산이 전체 경제 성장을 떠받친 것이다. 정부 소비는 1.4% 늘었다. 지출 항목별로 성장 기여도를 따져 보면 건설 투자는 GDP를 0.6%포인트, 정부 투자는 GDP를 0.2%포인트 끌어올렸다. 부동산과 재정이 없었다면 3분기 성장률이 마이너스라는 얘기다.

다른 경제지표는 처참한 수준이다. 무엇보다 우리 경제를 이끌어온 제조업 엔진이 빠르게 식어가고 있다. 지난해 연간 제조업 가동률은 74.3%다. 1998년 67.6%를 기록한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올해 2분기에는 제조업 가동률이 72.2%까지 떨어져 역대 최악의 분기 성적인 1999년 1분기(71.4%) 수준까지 나빠졌다. 1998년 0.7%였던 제조업 매출액 증가율은 지난해 -3.0%가 됐다.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2014년에 마이너스(-1.6%)를 기록한 이후 2년 연속 역성장이다. 중후장대 산업이 구조조정 등으로 한계에 부딪힌 데다 수출부진까지 겹친 탓이다.

경제 지표가 이런데 기업들이 웃고 있을 리가 없다. 지난해 신용평가회사들이 신용등급을 떨어뜨린 기업만 159곳이다. 1998년 171곳이 강등된 이후 최대치다. 지난해 기업파산ㆍ법정관리 신청 기업 수는 1511개. 통합도산법이 실행된 2006년 전의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1998년 법원에 접수된 파산ㆍ회사 정리 사건은 1300여건으로 추산된다. 최근 경영 백기를 든 기업이 외환위기 때보다 더 많다는 얘기다.

1998년도 처참했지만…

서민들의 삶도 팍팍하다. 무엇보다 가계의 경제상황이 악화됐다. 1998년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183조원에 불과했다. 반면 올해 2분기 말 현재 가계부채 규모는 1257조원이다. 600% 넘게 부풀었다. 한편에선 ‘부채 주도 성장 정책’에서 기인하는 어쩔 수 없는 후유증’이라고 반박한다. 레버리지를 활용해 성장을 꾀했으니, 가계부채가 늘어난 건 당연하다는 거다.

하지만 이는 설득력이 한참 떨어진다. 1998년 10.6%에 불과했던 GDP 대비 가계부채가 지난해 36.2%로 급증했기 때문이다. 부채 주도 성장 정책이 GDP를 효과적으로 끌어올리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부채의 질도 좋지 않다. 상환능력을 나타내는 지표 중 하나인 가처분소득 대비 부채비율은 1998년 57.6%에서 지난해 143.0%로 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가계 부채가 소득보다 훨씬 빠르게 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가계 부채가 11.2%가 늘어나는 사이 가구 소득은 겨우 0.9% 증가했다. 서민들이 빚으로 빚을 갚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이유다.

청년실업률, 외환위기 시절에 근접

국가의 미래라는 청년층은 절망에 빠져있다. 지난해 청년실업률은 9.2%다. 2007년 이후 상승곡선을 타더니 1998년 청년실업률인 12.2%에 근접하고 있다. 가장 최근 통계인 올해 9월 청년층 실업률은 9.4%다. 외환위기를 수습하던 1999년 9월 청년실업률 8.9%를 넘어섰다. 전문가들은 아르바이트 등 임시 일자리에 머물면서 취업 준비를 하는 청년까지 포함한 체감 청년실업률은 20%를 훨씬 웃돌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경제가 예고된 외부 리스크를 견뎌낼 수 있을지 미지수다. 우선 연내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은 ‘기정사실’이 됐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ㆍBrexit)의 여파도 내년부터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 문제도 아직 풀지 못한 리스크다. 2016년의 한국 경제가 외환위기보다 더 낫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얘기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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