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려고 대통령 했나

▲ 미국 뉴욕타임스가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의 뇌를 조종하는 만평을 실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정상외교를 정상적으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사진=뉴시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이 19~20일 페루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불참하기로 했다. 외교부는 “북한의 5차 핵실험 등 한반도 상황이 엄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외교부 해명대로라면 더욱이 이런 다자간 국제회의에 참석해 여러 정상들과 대면하며 한국의 입장을 설득해야지 왜 불참하나.

톡 까놓고 말해 안 가는 게 아니다. 못 가는 것이다. 최순실 게이트가 외신을 타고 지구촌으로 퍼지면서 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국제적 조롱거리가 됐다. 세계적 권위지인 미국 뉴욕타임스가 최순실이 박 대통령의 뇌를 조종하는 만평을 실을 정도다. 이런 판에 국제무대에 서봤자 겸연쩍을뿐더러 말발도 통하지 않을 게다. 

박 대통령의 APEC 불참 결정은 한국 외교의 마비 상태를 드러내는 일대 사건이다. 당사국간 조약을 체결하는 것도 아닌 지역 내 느슨한 다자간 협의체로 매해 열리는 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라면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사안을 놓고 밀고 당기는 정상외교인들 정상적으로 임할 수 있겠는가.

‘정상외교의 비정상화’ 우려는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미국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청와대가 보여준 행보로 입증된다. 박 대통령은 9일 오후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소집했다. 미국의 새 대통령 당선에 따른 경제ㆍ안보 분야의 대책 마련을 지시했다. 10일 오전 트럼프 당선인과 통화하면서 굳건한 한미동맹의 필요성을 강조한 점도 부각시켰다.

하지만 다분히 보여주기식 이벤트 성격이 짙다. 안보상 중대한 위협이 있을 때 필요한 NSC를 동맹국의 새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소집한 것부터 어색하다. 트럼프 당선인과의 통화도 박 대통령이 이야기하면 당선인이 “100% 동의한다” “함께 하겠다”며 의례적으로 답변하는데 머물렀다. 청와대와 외교부는 역대 정부 중 가장 빨리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통화한 점을 내세웠지만, 전화 연결 시각이 아베 일본 총리보다 두시간 늦은데다 통화시간도 아베 총리(20분)의 절반에 그쳤다.

더구나 트럼프 당선인은 아베 총리와의 대화를 적극 주도하면서 그가 APEC 참석차 페루로 가는 길인 17일 뉴욕에서 만나 회담하기로 했다. 국력과 외교력 차이가 작용했겠지만, 최순실 게이트로 추락한 대한민국 대통령의 위상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어 씁쓸하다. 이제 와서 박 대통령도 APEC에 참석할테니 귀국길에 만나도록 짬을 내달라고 할 수도 없고….

트럼프 시대가 예고됨에 따라 한국은 안보와 경제 등 여러 면에서 과거와 사뭇 다른 도전에 직면했다. 신고립주의를 주창하는 트럼프 당선인은 북핵과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등 한미간 현안을 기존 미국 노선과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서도 반감을 드러내는 등 보호무역주의 색채가 농후하다. 여느 때보다 국가적 차원의 기민한 대처가 요구되는데 국가수반인 대통령이 통치능력을 상실했다.

갤럽이 조사한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는 11월 들어 2주 연속 5%다. 60대 이상만 두자릿수일 뿐 나머지 연령대는 한 자릿수요, 특히 20대는 0%다. 경제ㆍ사회 등 내치內治는 총리에게 맡기고, 대통령은 외교ㆍ안보 등 외치外治를 담당하게 하자는 거국내각 구성 방안이 논의 중이지만, 지지율 5%의 대통령이 주요국 정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터놓고 미래 전략을 논의할 수 있을까.

최순실 게이트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검찰 수사가 신뢰를 잃은 가운데 자고 나면 새로운 비리와 의혹이 터져 나온다. 심지어 청와대 수석과 비서관들이 사기꾼이나 쓰는 것으로 알았던 대포폰을 몇개씩 들고 다니며 사용했다. 누구보다 원칙과 신뢰를 강조해온 박 대통령 아니었던가.

실망과 분노, 참담함에 사회가 집단 우울증과 무력감에 빠져 있다. 노오~력을 해도 안 된다는 좌절과 상실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순실증’을 앓는 모습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며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었다. 시국선언이 국내 각계각층은 물론 해외로 이어지고 있다.

12일 촛불집회는 2000년대 들어 최대 규모다. 광장에 모인 국민의 뜻을 진정으로 헤아리지 않으면 군사정권을 무너뜨린 1987년 6월 항쟁에 버금가는 11월 항쟁으로 번질 것이다. 성난 민심의 촛불 앞에서 박 대통령은 2선 후퇴나 그 이상의 권한 내려놓기를 결단해야 한다. 야당도 촛불에 기대지만 말고 정치력을 발휘해 국정공백 상태를 조기에 수습하는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양재찬 더스쿠프 대기자 jayan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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