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가슴이 무너진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에게 밝힌 심정이다. 문제는 국민들의 상실감은 ‘가슴이 무너지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삶의 희망이 무너졌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자는 약속이 깨졌다. 국민들은 되묻는다. “아프냐? 나는 더 아프다!” 국민은 지금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 박근혜ㆍ최순실 게이트로 국민들의 상실감이 커지고 있다.[사진=뉴시스]

‘순실의 시대’가 유행이다. 박근혜ㆍ최순실 게이트가 모든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요즘의 사회상을 빗댄 말이다. 이 유행어의 모티브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기 소설 「상실의 시대」다. 물론 이 책의 제목으로도 현 시국을 설명할 수 있다. 최근 들어 국민들이 느끼는 상실감이 너무 커서다. 국정농단 뉴스를 보고 있으면 건강을 잃는다는 ‘순실 증후군’이 유행어 대열에 올라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1차부터 3차 대국민 담화 내내 자신의 결백만 주장하던 박근혜 대통령 역시 국민들에게 상실감을 안겨주기는 마찬가지다. 박 대통령은 검찰 조사를 받겠다는 입장을 뒤집으면서 국민감정을 자극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답답한 정국이 끝날 기미가 보이는 것도 아니다. 당 지지율이 3위까지 떨어진 집권여당은 친박-비박 내분에 휘말렸다. 두 야당은 각종 현안을 두고 삐걱대고 있다. 결국 ‘박근혜ㆍ최순실 게이트’에 분노하고 저항하고 있는 건 국민뿐이다. 다섯 차례 집회에서 430만명(주최측 추산)이 촛불을 켰을 정도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긋지긋한 상실의 시대를 끝내고 싶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거리로 나온 이유

무엇보다 청년들이 분노를 느꼈다. 최씨의 딸 정유라씨가 고등학교ㆍ대학교 입시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대입 경쟁은 치열하기로 유명하다. 듣기평가 시간에는 비행기도 못 뜬다. 정씨가 입학할 때는 달랐다. 지원자격에 미달했음에도 떡하니 합격했다.

정씨의 입학연도인 2015년에 체육특기생 종목이 확대돼 처음으로 승마가 포함됐다. 출석을 하지 않아도 출석으로 인정됐고 부실한 보고서를 내고 B학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제출기한을 넘겨도 칭찬해주는 교수가 있었다. 정씨는 후원도 톡톡히 받았다. 많은 대학생들이 시간당 최저 임금 6030원을 아슬아슬하게 넘기는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학비를 벌었지만 정씨는 삼성그룹의 보이지 않는 지원을 받았다. 검찰이 지금껏 밝혀낸 현금 송금액만 35억원에 달한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며 창업에 나선 청년들도 상실감을 느끼긴 마찬가지다. 권력이 있는 자들과 친분이 있다면 억대 정부 지원금쯤은 쉽게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최씨의 조카 장시호씨는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를 설립했다. 동계스포츠를 육성한다는 구실로 1년새 정부로부터 6억7000만원의 지원금을 받았다. 안 그래도 소득과 교육 수준이 대물림되는 세상이다. ‘노력하면 된다’는 최소한의 희망마저 상실했다.

공무원 사회도 허탈함을 호소하고 있다. 대통령이 국가 행정 시스템이 아니라 비선에 의지해 국정을 꾸려온 사실이 드러나면서다. 정책과 민원의 일선 현장에서 앞만 보고 달려온 공무원들아 자부심을 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기껏 내놓은 정책들이 비선에 이용됐을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엘리트 공무원의 ‘부역행위’가 검찰수사에서 낱낱이 드러난 점도 문제다. 관료 출신 청와대 수석이 재벌회장에게 협박 전화를 하고, 청와대 경제수석실이 최순실 재단 모금 과정에 동원됐다. 직무에 충실한 공무원이라 할지라도 비선세력의 눈밖에 나면 부당하게 쫓겨났다.

‘문화 융성’이 정책의 큰 방향 중 하나로 제시됐을 때 반가움을 표시했던 문화ㆍ예술계도 충격에 빠졌다. 비선세력은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린다는 명목으로 해괴한 재단을 만들어 돈을 빼돌렸다. 관련 인사를 좌지우지했으며, 국가 행사나 국가 브랜드를 만드는 사업에까지 손을 뻗쳤다. 예술인 검열을 위한 블랙리스트가 작성되기도 했다. 이들은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이 명단에 올라야 했다.

자영업계도 허탈하기는 마찬가지다. 국민들이 무력감에 빠지면서 지갑을 열지 않고 있어서다. 11월 소비자심리지수는 95.8 포인트로 금융위기가 터진 직후인 2009년 4월(94.2 포인트) 이후 7년7개월 만에 최저치를 찍었다. 메르스 사태로 소비절벽을 겪은 지난해 6월(98.8포인트)보다 낮은 수준이다.

 
연말연시 특수가 실종되면서 이들의 한숨은 더 깊어졌다. 이 와중에 최씨의 단골 성형외과 원장이 개발에 참여한 화장품 기업이 승승장구했다는 사실은 자영업자들에게 충격을 줬다. 이 업체는 국내 주요 오픈마켓은 물론 대기업 계열의 온라인쇼핑몰에도 입점했다. 그 어렵다는 면세점에도 입점에도 성공했다.

월급쟁이들도 큰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 아무리 일을 해도 소득이 늘지 않아서다. 가계소득 상승률은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지 6.0% 수준을 유지하다 1.0% 미만으로 떨어졌다. 가구소득 상승률은 지난해 3분기 0.7%로 떨어진 뒤로 5분기 연속 0%대를 유지하고 있다. 물가 상승률을 고려한 실질소득 증가율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0.1% 줄었다. 실질소득 증가율은 지난해 3분기 이후 5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이어가고 있다. 5분기 연속 감소는 통계 집계를 시작한 2003년 이후 처음이다.

없는 살림에 대출만 받다보니 가계부채는 1295조8000억원(2016년 3분기 기준)까지 치솟았다. 이는 2분기 대비 3.0%(38조2000억원) 증가한 수치다. 증가세는 제2금융권에서 이끌었다. 3개월 만에 11조원이나 늘어 통계 작성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시중은행들이 가계대출 심사를 강화하자 풍선효과로 제2금융권에 서민대출이 몰리고 있는 탓이다. 연 25.0% 이상 고금리 대출 비중도 높아지고 있다. 금리 인상을 앞둔 미국의 영향으로 우리나라 금융권의 대출 금리가 오르면 이자 부담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비선 탓에 허탈감에 빠진 민초

▲ 경기 침체로 소득은 주는데 가계대출로 인한 이자 부담은 커지고 있다.[사진=뉴시스]
이들에게 내집 마련은 꿈같은 일이다. 가계대출이 늘어나는데 부담을 느낀 정부가 연이어 아파트 집단대출 규제책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씨 일가는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정씨는 수출 기업들의 주로 이용하는 보증신용장으로 3억원의 돈을 손쉽게 대출받았다. 대출금리는 1.0%를 넘지 않았다.

큰 상실감이다. 많은 국민들이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문제는 우리 국민들이 집회가 끝나고 나서도 생계의 어려움을 그대로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이동주 을살리기운동본부 정책실장은 “국민들이 원하는 건 대통령의 퇴진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원하는 것”이라며 “이는 정책을 결정하는 정부의 몫인데 그들은 신뢰를 잃어버렸다”고 꼬집었다. ‘상실의 시대’, 국민의 또다른 짐이 됐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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