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때와 남을 때

▲ 마거릿 대처는 스스로 권자에서 내려와 말년에 존경을 받았다.[사진=뉴시스]

물러날 때를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뜻의 ‘횡거철피橫渠撤皮’란 말이 있다. 중국 송나라 대학자인 장횡거는 호랑이 모피를 깔고 앉아 벌이는 강연으로 유명했다.

어느날 저녁 젊은 형제가 그를 찾아와 함께 ‘주역’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다음날 장횡거는 강의할 때 깔고 앉던 호랑이 모피를 거두고 고향으로 떠나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난날 강의한 것은 도를 혼란하게 한 것이니라. 그대들은 저 젊은 형제를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 장횡거가 이렇게 호피를 거두는 철피撤皮를 했다고 해서 ‘횡거철피’란 말이 생겼다. 장횡거는 낙향한 후에도 그가 말한 형제인 정호, 정이와 함께 송나라 유학인 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대학자로 존경을 받았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떠나면서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겼다. 올해 92살의 구 명예회장은 70세가 되던 해인 1995년 사장단회의에서 회장직 전격 사임을 선언하며 천안행을 선택했다. 그는 천안 연암대에서 분재와 버섯재배를 취미로 삼아 평온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LG그룹에는 그 흔한 경영권 다툼이 없다.

이에 비해 95세인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은 하산할 때를 놓쳐 험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 두 아들에게 경영권 넘기는데 시간을 끌다가 형제간 골육상쟁의 빌미를 줬다. 그 와중에 전문경영인이 자살을 하고, 신 총괄회장의 외동딸은 감옥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했다. 90대 중반의 그에게 억만금의 재산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맨주먹으로 일본에 건너가 재계 5위의 그룹을 일궈냈지만 그의 말년은 초라하고 외로워 보인다.

인간은 어차피 떠날 운명이다. 정든 회사에서도 떠나고, 사랑하는 가족과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 떠나는 것을 두려워할 일도 슬퍼할 일도 아니다. 남아 있는 사람도 어차피 떠날 사람이니 ‘이미’ 떠난 사람과 ‘곧’ 떠날 사람으로 나눠질 뿐이다. 새로운 곳에선 또다른 인생이 펼쳐질 것이다. 버려야 얻는다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닉슨 대통령은 제때 떠나는 용기를 내지 못해 미국인에게 수치스러운 대통령으로 기억된다. 사실 워터게이트는 사건 자체는 대수롭지 않았다. 사건이 터진 후 2년간 닉슨은 방해ㆍ회유ㆍ은폐 거짓말 등으로 사태를 오히려 키웠다. 마지막에 사임은 사면 약속과 맞바꿨으니 ‘최악의 대통령’을 자초한 셈이었다. 반면 11년간 영국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는 별다른 실책이 없었는데도 권좌에서 자기 발로 내려오는 용기를 택했다. 그는 보수당 하원의원들의 투표로 결정하는 당 대표선거에서 라이벌인 헤슬타인에게 204표 대 152표로 이겼다.

하지만 당헌에 따라 2차 투표를 하게 되자 고민 끝에 재투표를 포기하고 사임의사를 밝혔다. 만약 2차 투표에서 패하면 라이벌에게 당권을 완전히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대처는 사퇴하면서 측근인 존 메이저 의원을 새 총리로 지명해 그 뒤 수년간 막후 실세의 지위를 누렸다.

사상 최저치인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 4%는 휴대전화 배터리를 빨리 교체하고 싶은 국민들의 염원이 담겨있는 수치다. 그동안 너무 오래 지체했다. 더 버티면 본인은 물론 안보와 경제가 회생불능의 수렁으로 빠질 것이다. 박 대통령의 3차에 걸친 담화문을 보면 권력 미련을 못 버렸던 지난 두 차례의 담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 말하는 대통령에게서 많은 국민들은 진정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담화 내용에는 촛불집회와 탄핵이라는 위기상황을 일단 모면하고 보자는 정치공학적인 셈법이 짙게 배어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단 한순간도 사익私益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강변할 때가 아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아무 조건 없이 떠날 용기를 내야 한다. 박 대통령이 초심으로 돌아가야 박정희 신화神話가 살고, 한국의 보수가 다시 싹트고, 경제가 다시 기지개를 켤 수 있다. 아름다움은 우릴 자극하지만, 장엄미는 우릴 감동시킨다는 말이 있다.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진짜 멋진 사람이다.

정상엔 임자가 없다
잠시 머무르다
떠날 뿐
정상을 향해 흘린 땀의
흔적만 남을 뿐
정상엔 앉아 쉴만한 의자가 없다
하산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어둡기 전에
금의환향이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운가
[하영순 시 ‘바람의 흔적’]

윤영걸 더스쿠프 부회장 yunyeong0909@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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