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 최순실 게이트에 숨은 축복

▲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대한민국을 개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사진=뉴시스]
1997년 말 느닷없이 찾아온 IMF 외환위기는 재앙 그 자체였다. 이대로 한국이 주저앉을 것이라는 절망 속에 고용불안과 실업의 공포가 유령처럼 이 땅을 배회했다. 당시 몇몇 외국 언론들은 나락奈落에 빠진 한국의 현실에 대해 ‘숨겨진 축복(Disgu ised Blessing)’이라고 불렀다. 외환보유고가 텅텅 비어 깡통을 찬 나라에 축복이라니? 당시에는 빈정거리는 얘기로 들렸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고개가 끄떡여진다.

그들은 한국의 고질적인 병폐를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는 뜻에서 축복을 말했다. 외국 언론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코스피 지수 280까지 밀렸던 주가는 2000 가까이 치솟았다. 한국은 ‘눈물의 비디오’로 상징되는 민초의 희생과 눈물을 연료로 삼아 20년 가까이 질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환위기를 자초했던 김영삼 대통령은 온갖 비난을 받았지만, 뒤를 이은 김대중ㆍ노무현ㆍ이명박 대통령은 적어도 경제적인 면에서는 외환위기의 ‘축복’을 받은 대통령이었다.

많은 한국인들은 5공 청산과 잇단 대통령 친인척 비리 의혹 수사를 계기로 한국이라는 배는 수리를 끝마친 줄 알았다. 큰 착각이었다. 경제는 물론 정치ㆍ사회 시스템이 썩고 중병이 들어있는 것을 대통령이 연루된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건을 계기로 뒤늦게 알게 됐다. ‘이게 나라냐?’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분노한 촛불민심은 부끄러움에 대한 자탄이다.

이번 최순실 게이트는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내는 하늘이 내린 기회다. 한국에서 기업을 하자면 힘있는 갑甲에게 돈 주지 않고 해결되지 않는다. 기업으로는 억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연간 20조원 이상 이익을 내는 삼성전자가 최순실의 딸에게 35억원짜리 말을 사준 것을 이재용 부회장에게 일일이 보고하지 않았다는 삼성 측 해명도 수긍이 가는 면이 있다.

그러나 이번에 최순실 게이트에 관련된 재벌 총수들에게 법의 잣대에 따라 엄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을 한 제갈량처럼 만일 뇌물죄가 인정된다면 쌍방처벌해야 이 땅에 정경유착의 고리가 영원히 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은 공짜가 없다. 돈을 주면 반드시 반대급부를 요구한다. 권력은 기업에 뇌물이 아니라 철저한 도덕성을 요구해야 한다.

“형태가 기능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대통령이 재벌총수를 독대하면 곧바로 세상에 알려지게 하는 시스템, 최순실ㆍ차은택ㆍ고영태가 날뛰면 감독당국에 체크되는 제도가 있었더라면 기능도 달라졌을 테고, 최순실 국정농단은 발 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여야는 국가경영을 어떻게 할까 하는 큰 그림을 꺼내야 하는데 정쟁에만 몰두하고 있다. 국회 탄핵소추안 통과 이후에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하고, 정략가는 다음 선거만을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지금 이 땅에는 정치가 대신 정략가와 정상배들이 판을 치는 형국이다. 단지 대통령 임기 몇개월 단축하려고 온 국민이 촛불을 든 것은 아닐 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의 대통령들이 대부분 불행한 뒷모습을 보인 것은 잘못된 정치시스템 탓이 크다. 4ㆍ19혁명과 6월 민중항쟁을 통해 개헌을 이룬 바 있다. 개헌은 혁명적인 상황에서만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제 한국의 정치는 시대에 걸맞게 다양한 시민들의 기대와 욕구를 효율적으로 반영하고 조정하는 국회중심 정치로 탈바꿈해야 한다. 촛불의 힘을 정치제도 개혁으로 몰아가야 한다. 역설적으로 보면 최순실 국정농단은 우리가 고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뼈아프게 깨우쳐준 반면교사다. 물론 국가를 개조하고 틀을 새로 짜는 것은 쉽지 않다. 세월호 이전은커녕 1960년대 개발독재 시대로 후퇴한 국격을 보면 국가개조는커녕 망가진 경제 사회시스템을 복원하기에도 벅찰 것이다.

기존 정치권에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 바른 정치는 수준 높은 국민의 참여에서 나온다. 이제 국민이 나서서 사이비 정치인들을 솎아 내야 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를 고민하고 토론해서 해법을 내놓고, 정치권에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

촛불은 영원히 탈 수 없다. 촛불은 분노가 아니라 희망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 촛불이 횃불이 되고, 횃불이 들불이 되어 타오를 때 사회의 구조적인 변화, 시대적인 전환기가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국민들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책임자 처벌과 정권교체를 넘어 세상의 변화를 원한다. 고통은 축복의 또 다른 얼굴이다. 고난을 딛고 또 다른 신화를 이뤄내기를 기원한다.
윤영걸 더스쿠프 부회장 yunyeong0909@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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