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유진룡(60)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행정고시 합격 후 문체부에만 근무한 정통 문화 관료다. 문체부 출신 첫 문체부 장관을 지낸 그는 역대 정권이 재벌들에 손을 벌린 건 기부금품모집금지법을 어긴 불법행위라고 말했다. “미르ㆍ케이스포츠재단의 수상한 모금이 문제가 되는 건 아무도 모르게 받아 아무도 모르게 쓰려다 걸렸다는 겁니다. 똑같은 위법이지만, 공식적으로 받아 투명하게 관리한 과거 사례들과는 다르죠.” 유 전 장관과의 출국 전 단독 인터뷰.
 

▲ 유진룡 전 장관은 “우리가 박 대통령이 그런 사람인 줄 왜 미처 알아채지 못했는지 각자의 위치에서 통렬히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천막사진관]

“공직자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은 겁니다. 이 정부 들어 그렇게 운신 폭이 계속 줄어들다 보니 각 부처의 의사결정권자들이 막상 판단하고 행동해야 할 때 ‘가만히 있었던’ 것이죠.”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대통령에게 내각 총사퇴를 건의한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대통령과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모든 결정은 대통령이 한다”는 ‘교시’를 지속적으로 주입한 결과 배가 가라앉는 장면을 TV로 지켜보면서도 공무원들이 ‘스스로 결정하면 안 된다’는 자기암시의 주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12월 19일 오후 유 전 장관과 10개월 만에 같은 장소에서 마주앉았다.

✚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직(presidency) 자체에 대한 인식이 박약했던 거 같습니다. 단적으로 관저에 있으면서 집무실로 출근(역대 대통령의 집무실 출근을 ‘등청’이라고 불렀다)하지 않은 날이 많았다고 보도됐는데요?
“적절한 행동은 아니지만 일하는 스타일의 문제로 볼 수도 있습니다. 공직을 떠나 있는 동안 아침이면 넥타이 매고 서재로 출근했다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관저든 어디든 ‘대통령이 있는 곳이 집무실’이라고 했지만, 집무실과 관저는 구분해야죠.”

✚ 대통령 한번 잘못 뽑았을 뿐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나요?
“대통령은 5년간 온 국민의 생명ㆍ복지와 생존 환경을 책임지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박 대통령이 그런 사람인 줄 왜 미처 알아채지 못했는지 저를 포함해 각자 자기 위치에서 통렬히 반성하고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언론도 마찬가지고요. 18년 칩거 끝에 정치를 시작했는데 그 시절 어떤 상황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었고, 언젠가 문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제도적ㆍ정서적 맹점이죠.”

✚ 대통령과 내각의 관계도 문제가 있었다고 봅니다.
“당선 후 아버지 스타일로 급속히 권력을 장악했고 그 과정에서 김 전 실장 같은 사람이 공을 세웠습니다.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못한 채 3년이 흘렀고, 어떻게 보면 사소한 문제로 모든 게 드러났죠. 대통령이 국무회의 때면 자기 의견을 말하지 말고 받아 적기만 하라고 얘기한 거나 진배없습니다.”

그는 김 전 실장이 부임한 후 몇몇 수석비서관이 수석회의서 발언을 했다가 그에게 불려가 호되게 질책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국무위원들의 발언은 그가 암시적으로 막았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장관과 수석비서관들이 받아 적기만 할까? 기자는 TV화면이나 신문에서 대통령의 말을 이들이 열심히 받아 적는 모습을 보면서 엉뚱하지만 이들 가운데 낙서를 하거나 만화를 그리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했었다. 

유 전 장관은 이정현 당시 홍보수석에게 회의 때면 어차피 속기로 필기를 하는데 이 속기록을 풀어 참석자들에게 나눠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다고 한다. 이 수석이 반색을 하면서 좋은 의견이라고 했지만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그는 ‘받아 적는 모습을 대통령이 계속 보고 싶어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고故 김영한 전 민정수석과 같은 시기에 청와대 수석비서관으로 근무한 사람들의 업무수첩을 들여다보면 김 수석 비망록에 적힌 것과 같은 내용이 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수석비서관들의 수첩을 압수한다면 “수첩에 적힌 것은 김영한 수석이 자기 의견을 쓰는 경우도 있다”는 김 전 실장의 국회 청문회 증언의 진위를 가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아니, 명색이 회의인데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어떻게 참석자의 발언을 막습니까? 민주적인 리더십과 거리가 멀었군요.
“법과 상관없이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식의 태도였습니다. 모든 문제가 이런 리더십 스타일에서 비롯됐는데, 아주 위험한 사고방식이죠.”

✚ 박근혜 정부의 거버넌스는 한마디로 엉망이었습니다. 장관 재임 시절엔 어땠나요?
“각 부처에서 전문가의 의견과 상관없이, 아무런 토론도 없이 불합리한 결론이 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장관ㆍ수석들과 가끔 걱정들을 했어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대통령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죠. 일종의 동병상련이랄까요? 문체부의 경우 승마협회감사보고서 같은 문건이 하루 만에 외부로 새나갔습니다. 나중엔 대통령이 혼자 결정하는 게 아니라 외부의 싱크탱크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닐까 싶었어요. 어쨌거나 단독이든 외부의 개입이든 이런 식의 의사결정은 위험합니다. 세월호 참사 나고 나서 국무위원들을 배제한 채 정부조직 개편을 결정할 때 대통령에게 ‘누구와 의논하셨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라를 새롭게 만들려면 중지를 모아 최선의 안을 만들어야 하니 앞으로 이렇게 하시면 안 된다고 했더니 역정을 내면서 ‘그럼 대한민국 모든 국민에게 물어보고 일을 하라는 얘기냐’고 반문했습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을 마음이 아예 없구나 싶었죠.”

✚ 대통령이 정말 국정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스스로 왕이나 무오류적 존재인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 외부 세력이 누구인지 짐작도 못했습니까?
“외부에 싱크탱크 팀이 있다면 팀장이 정윤회씨일 거라고 추측했어요. 그렇다면 대통령이 사사로이 싱크탱크를 유지하느니, 욕을 먹더라도 정씨를 공식 라인으로 끌어들이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정윤회 문건 파동 전 일입니다. 대통령의 참모로 정식 임명되면 공식적으로 의견을 낼 테고 부처와 토론이 이루어질 기회가 생기죠. 비선 실세가 공식 라인을 압도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서로 소통할 기회도 없죠. 정윤회 문건 파동 후 정씨가 이혼했다는 이야기가 보도돼 ‘그가 아니라면 비선이 과연 누굴까’ 그런 생각들을 했었죠. 정씨가 아니라 최순실씨라는 걸 알고서 같이 근무한 장관들이, 의문은 풀렸지만 더 허탈해 했습니다.”

박근혜, 왕이나 무오류적 신이라 생각한 듯

✚ 국정은 시스템인데, 대통령의 독주를 사후적으로라도 규율할 수 있는 구조가 없었나요?
“공식적으로는 검찰의 몫이죠. 언론과 시민단체의 역할이기도 하고요. 정작 검찰은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했습니다. 김기춘-우병우의 휘하에서 반대자들을 압박하고 잡아들였죠. 검찰에 기개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고위 간부들에겐 김기춘ㆍ우병우가 롤 모델이었습니다. 언론은 권력과 유착됐거나 세계일보가 정윤회 문건 보도 후 세무조사 받는 걸 보고 겁을 먹었죠. 공무원 사회는 문체부 1급 실장 세 명의 옷을 벗기는 것을 보고 자기 의견을 밝히면 강제퇴직 당한다는 것을 학습했습니다. 결국 민주적 거버넌스의 축으로서 견제와 균형을 이뤄야 할 부문들이 제 역할을 못한 거죠. 제왕적 대통령제의 작동을 막을 새로운 시스템을 마련해야 합니다.”

✚ 1급은 신분보장의 대상이 아니라는 게 박 대통령 대리인단의 입장인데요?
“참여정부 시절 제도적으로 1급의 신분 보장 정도를 약하게 만들었지만 1급 공무원을 석연치 않은 이유로 내보낸 예가 없습니다. 문체부의 경우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적용하라는 청와대의 지시를 저와 1급 전원이 거부했습니다. 그 명단이 김종 전 2차관을 통해 청와대에 전달됐고 김기춘 전 실장이 김희범 1차관에게 지시해 이들이 정리된 거예요.”

✚ 공무원 사회가 부당한 대통령에게 불복종 운동을 벌일 순 없나요?
“주주의 재산인 기업과 달리 공공의 권력은 사유화의 대상이 아닙니다. 공무원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선량하게 관리할 의무를 진 사람들로서 옳지 않은 권부의 지시는 거부하고 저지해야죠. 그렇지만 상명하복의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게 공무원 사회의 기본 속성이기도 합니다. 결국 공무원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제도를 고쳐야 우리 사회가 건강해집니다.”

✚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김기춘 전 실장 ‘작품’ 맞습니까?
“제가 문화부에 들어온 유신시대부터 전두환 시대까지 블랙리스트가 있었습니다. 민주화되면서 없어졌죠. 이명박 정부 때도 개별적으로 차별한 사례는 있어도 리스트를 만들어 제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았어요. 공적 제도로 사적인 차별을 한 거예요. 김기춘 전 실장이 정부에 복귀하면서 30년 전으로 돌아간 겁니다. 아닐 말로 최순실 게이트 같은 측근 비리는 액수엔 차이가 있지만 정권마다 있었습니다. 김 전 실장은 언필칭 보수의 가치를 확산시켜야 한다고 했는데 신념에 따라 한 일이라면 당당하게 인정해야죠.”
 

▲ 유진룡 전 장관은 “법과 상관없이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식의 태도는 아주 위험한 사고방식”이라고 말했다.[사진=천막사진관]

✚ 블랙리스트가 왜 문제입니까?
“문화의 다양성을 말살하기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정권 말 잘 듣는 문화만 남게 되죠. 문화예술과 언론은 비판의식이라는 토양에서 꽃을 피웁니다. 그런 식으로 차별과 배제를 하면 창조경제도 가능하지 않아요.”

좌우 골고루 분포하는 사회가 건강해

✚ 일부에서 좌파 정부가 들어서는 걸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보나요?
“좌에서 우까지 골고루 분포하는 사회가 건강합니다. 그런 편 가르기 그만하고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같이 고민하고 해답을 찾아야죠.”

✚ 정권이 바뀌어도 정부가 연속성을 지니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이 보장돼야 합니다. ‘철밥통’ 문제를 개선해야겠지만 철밥통을 아예 차버려 신분보장을 약화시키면 정책의 연속성도 취약해집니다. 장관 할 때 문체부 공무원들에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리에 맞지 않는 지시를 하면 ‘노’라고 해라. 그게 공무원의 신분을 법으로 보장해 주는 목적이다.”

✚ 역대 정권도 재벌들에서 돈을 걷었다는 주장은 어떻게 보나요?
“미르ㆍ케이스포츠재단은 아무도 모르게 받아 아무도 모르게 쓰려다 걸린 겁니다. 똑같은 위법이지만, 공식적으로 받아 투명하게 관리한 과거 사례들과는 다르죠.”

인터뷰 다음다음 날 그는 남미행 비행기에 올랐다. 2남2녀의 셋째인 그는 해마다 형제들과 배우자도 동행하는 해외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문화부 차관을 지낸 후 을지대 여가디자인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여가문화학회장을 지낸 그가 6개월 전부터 이번 남미여행 계획을 짰다. 나이가 들어도 형제들끼리 동부인해 매년 해외여행을 하기란 쉽지 않다. “부모가 남긴 재산이 없어 형제 간에 상당히 화목하게 지냅니다(웃음).”
이필재 더스쿠프 대기자 stolee@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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