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 깊어지는 재래시장

“어렵다 어렵다 해도 이렇게까지 힘들었던 적은 없었어요.” 한 시장 상인의 말이다. 벌이가 시원찮아도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으면 감사하며 살아왔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힘들다고 한숨을 내쉰다. 나라가 뒤숭숭하니 사람들은 지갑을 열지 않는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언제까지 이런 악순환은 계속될까.

▲ 서울 서대문구 영천시장에 40년 만에 최악의 불황이 닥쳤다.[사진=이지원 기자]
문을 연 지 40여년 된 서울 독립문의 영천시장엔 2016년 최악의 한파가 몰아쳤다. 인근 아파트는 재개발에 들어갔고, 서울시 지원으로 설치한 지붕덮개도 손님 끄는 덴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몇몇 재래시장에서 인기를 끌어 도입한 도시락뷔페도 날이 추워지기 시작한 11월부터는 찾는 이가 드물다. 영하의 추위가 두꺼운 외투를 파고들었던 12월 27일 오후 더스쿠프(The SCOOP)가 그곳으로 들어가 상인들의 한숨을 들어봤다.

그날 오후 4시 30분, 저녁 준비를 위해 주부들이 한창 장을 볼 시간. 하지만 영천시장은 시계가 멈춘 듯 한산했다. 목 좋은 시장 입구에서 청과물가게를 하는 송경순(가명)씨는 하루빨리 어수선한 나라가 좀 안정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영등포시장에서 2013년에 이곳으로 둥지를 옮겼다는 그는 “2016년은 특히 더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박근혜ㆍ최순실 게이트 이후로 사람들이 지갑을 열지 않아요. 경기도 안 좋은데 나라까지 어수선하니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더 그런 거 같아요.” IMF 때 다들 어렵다고 할 때도 나름대로 먹고살 만했다는 송씨는 장사하면서 올해같이 힘든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시장 한편에서 소박하게 과일을 파는 이성미(가명)씨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경기 안 좋은 게 남들보다 더 직접적으로 와 닿아요. 그날그날 매상으로 나타나거든요. 연말인데 보세요. 사람이 없잖아요. 회식도 줄었고 예전같이 연말 축제도 없잖아요. 장사가 될 리가 없죠.” 그래도 이씨는 맞은편 이불가게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이라고 귀띔했다. “저 사장님은 진짜 힘든 거 같더라고요. 요즘엔 하루 한 사람이나 올까 싶어요.”

잠깐 딸에게 가게를 부탁하고 독감예방주사를 맞고 왔다는 문제의 이불가게 주인 박성진(가명)씨. 영천시장에서 10년째 이불장사를 하고 있다는 그는 이씨 말마따나 요즘 죽을 맛이다. 나아지기는커녕 앞으로 더 어려워질 거 같아서 이불장사를 계속해야 하는 게 맞는지 고민까지 하고 있다. “옷이든 이불이든 요즘 누가 비싼 돈 주고 사려고 하나요. 싸게 사서 한철만 쓰자는 생각이지. 트렌드가 그러니까 당해낼 재간이 없네요.” 몇몇 상인들은 인근 아파트 재개발이 끝나면 숨통이 트일 거라고 기대하지만 박씨는 부정적이다. “한번은 오겠죠. 하지만 과연 아이들 손잡고 길 건너 시장까지 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전 점점 더 어려워질 거라고 봐요.”

한영숙(가명)씨는 남편과 나란히 앉아 한약재를 판다. 영천시장에서 보낸 세월만 30년이다. 그런 그도 “나라가 문제”라고 한숨을 내뱉었다. “먹을 거 파는 사람은 그나마 나아요. 2000~3000원 하는 식재료는 그래도 팔리거든. 나야 애들도 다 키웠고 큰돈 버는 거 아니니까 욕심내지 않고 하고 있어요. 한창 애들 키우는 젊은 사람들이 더 어렵지 뭐.”

▲ 한창 장을 볼 시간이지만 영천시장은 시계가 멈춘 듯 한산하다.[사진=이지원 기자]
영천시장에서 13년째 정육점을 하고 있다는 김범령(가명)씨가 바로 시장의 젊은 사람이다. 김씨는 덤덤한 표정으로 고기를 썰며 “갈수록 더 힘들지만 어쩌겠냐”고 말했다. “좋은 일이 있어야 사람들이 고기도 사다 먹고 하죠. 요즘에는 촛불집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주말에도 손님이 없어요.”

그런데 이게 재래시장만의 문제뿐일까. 가까운 사람이 영천시장에서 장사를 해 한번씩 들른다는 이경옥(가명)씨는 재래시장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도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여기 오는 길에 볼일이 있어서 잠깐 백화점에 들렀거든요. 그런데 거기도 식품매장이나 카페에 사람이 좀 있을까 거의 없더라고요. 내년 상반기가 지나면 좀 경기가 풀릴 거라는 사람들도 있는데 전 사실 잘 모르겠어요.”

너나할 것 없이 모두 2016년이 특히 힘들었다고 했다. 박근혜ㆍ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후 더 그렇다고 했다. 엄살일까. 아니면 남들이 다 그러니까 저절로 그런 기분이 드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정말 사는 게 더 팍팍해진 걸까.

허경옥 성신여대(소비자심리학과) 교수는 이렇게 분석했다. “박근혜ㆍ최순실 게이트가 시발점이 됐다고 봐요. 어지러운 정국과 경제정책의 실패에 국제시장까지 총체적 난국이죠. 연말이지만 승진 같은 좋은 소식은 들리지 않고 구조조정의 칼바람만 불고 있어요. 잠재해 있던 불안심리들이 박근혜ㆍ최순실 게이트를 기점으로 소비에 반영된 거죠. 미래는 불안하고 2017년 전망도 좋지 않으니 일단 소비를 줄이고 보는 겁니다.”

내년에는 좀 나아지려나…

상인들의 한숨을 뒤로 하고 시장을 나오기 직전, 취재를 마친 기자는 저녁 찬거리를 사볼 겸 지갑을 열었다. 지갑에 든 건 현금 1만원뿐. 일단 싱싱해 보이는 섬초 한 봉지를 2000원에 샀다. 남은 돈으로 고등어조림 재료를 살까 하고 생선가게에 갔다. 그런데 고등어 한손 가격은 8000원. 고등어를 사도 무를 살 수가 없어 잠깐 고민하는 마음을 눈치 챘는지 가게 주인이 1000원을 깎아줬다. 남은 1000원으로 무를 사러 돌아다녔으나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무는 없었다. 결국 기자는 무 대신 찹쌀떡만 두 개 사들고 집에 돌아왔다. 물건을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매서운 한파가 불어 닥친 연말의 어느 하루였다.
김미란ㆍ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larmer@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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