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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걸의 有口有言] 비참한 행렬 ‘짤짤이 순례’ 아시나요?자존심 못 지켜주는 우리의 복지
[223호] 2017년 01월 10일 (화) 06:10:57
윤영걸 편집인 yunyeong0909@thescoop.co.kr

   
▲ 가난은 이제 개인 탓이 아니다. 사진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사진=더스쿠프포토]
사람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로마 카이사르의 말을 소개했다.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영화는 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마치 요술경처럼 다르게 느낌이 오는 영화다.

평생을 성실히 살아온 목수 블레이크는 심장발작으로 더는 일을 못하게 된다. 그는 국가에 질병수당을 청구하지만 “심사결과가 15점 이상 돼야 하는데 당신은 12점이라 받을 수 없다”며 거부당한다. 항고를 하려 해도 절차가 너무 복잡하다. 통화를 위해 두 시간의 연결대기음을 기다려야 하고, 관공서 직원들에겐 ‘귀찮은 거지’ 취급을 받는다.

구직센터에서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느낀 그는 뚜벅뚜벅 걸어 나와 건물 벽에 검정 스프레이로 글을 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굶어죽기 전에 항고 날짜를 잡아주길 요구한다. 그 구린 통화연결음도 바꿔!” 다니엘은 복지급여를 받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항고하다 화장실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숨을 거둔다. 영화는 그가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닌’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살아온 한명의 시민임을 보여준다.

박병원 한국경영자총연합회장은 “자신의 삶을 공공公共의 손에 의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하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영화평을 썼다. 아울러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지고,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들을 돌보기 위한 비용을 세금으로 내고 사는 것이 정상이고 원칙이며, 그것이야말로 ‘국가나 권력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국가나 권력을 탓하지 말고 국민 스스로가 자력갱생하라는 얘기다. 재경부 제1차관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거쳐 기업 경영자를 대변하는 자리에 있는 그로서는 나라 살림살이를 축내는 보편적 복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블레이크가 과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상태였나. 몹쓸 질병을 앓고 있던 차에 엉성한 시스템 때문에 제대로 질병수당을 받지 못한다. 실업수당을 받고자 하니 질병 때문에 구직활동 자체가 안 된다. 그는 이미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몰린 처지다. 노회찬 정의당 국회의원은 영화관을 찾아다니며 ‘관객과의 대화’를 열고, 갈수록 심각해지는 양극화 현상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내친김에 모든 국민에게 최저생계비를 지원하는 기본소득 도입까지 주장할 태세다.

이 영화는 웬만한 공포영화보다 더 두렵다. 영화의 배경이 복지선진국인데도 저러니 한국은 어떤 미래가 전개될까 불안감이 앞선다. 영화에 나오는 미혼모는 두 아이를 혼자 키우면서도 보조금을 받지 못해 슈퍼마켓에서 생리대를 훔치다 적발되고, 급기야 몸을 팔아 생활비를 번다. 아이는 신발밑창이 닳아 없어진 채로 다니다 친구들로부터 놀림감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영국은 곳곳에 생필품과 식품을 무료로 제공하는 식품제공소가 있다.

질병수당은커녕 종교단체에서 주는 푼돈을 받으려고 아픈 몸을 이끌고 새벽부터 줄을 서는 노인들이 즐비한 이 나라에서 다니엘의 외침은 배부른 투정처럼 들릴 수가 있다. 종교단체에서 주는 200~300원의 동전을 받으려고 돌아다니는 일명 ‘짤짤이 순례자’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일주일에 고작 3만~4만원을 벌기 위한 ‘비참한’ 행렬이다. 최소의 복지는 인간의 자존심을 지키게 해준다. 영화에서 블레이크는 “자존심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고 절규한다.

정치권은 달콤한 대선공약 만들기에 골몰한다. 경제성장 하나에도 동반성장ㆍ균형성장ㆍ포용성장ㆍ공정성장ㆍ국민성장 등 온갖 접두사를 붙인다. 단순히 정권교체만으로는 희망이 없다. 진보냐 보수냐를 가르는 것도 무의미하다. 영국의 토마스 모어는 “가난은 사회구조의 산물이다”고 말했다. 가난을 더 이상 개인 탓으로 돌리기에는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 국가경영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길이 없어 보인다. 이제 인간으로 존중받는 개인의 삶 향상을 위해 국가가 빈민구제에 적극 나설 때다.

“제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 나는 사람이지 개가 아닙니다. 나는 나의 권리를 요구합니다. 나를 존중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주인공 다니엘이 항고법정에서 읽으려고 써서 가져왔던 편지는 장례식장에서 그가 어려운 형편에도 도움의 손길을 주었던 싱글맘의 입을 통해 나직이 울려 퍼진다.
윤영걸 더스쿠프 편집인
yunyeong0909@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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