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인생을 위한 장도를 축하하면서 …

▲ 퇴직은 무덤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다.[일러스트=아이클릭아트]
K형, 찬바람이 살을 에는 지난 연말에 회사를 그만두셨더군요. 아직 자녀들 학자금 들어갈 일이 많은데 얼마나 황망했을까요. 소식은 들었지만 선뜻 연락할 엄두가 나지 않아 편지로 대신합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그 아픔이 헤아려집니다. 조직에 몸을 바쳐 충성했는데 비정하게 버림받았다는 배신감과 좌절은 불면의 밤으로 이어지게 마련이지요. 도대체 퇴출 기준이 뭐냐고 울분을 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닙니다. 기업에서 퇴직자 선정은 마치 피구 경기와 같습니다. 그냥 ‘운 없는’ 사람들이 아웃된다고 보면 될 겁니다. 날아온 공에 맞으면 곧바로 떠나야 하는 것이 급여생활자의 숙명이라면 차라리 한살이라도 젊을 때 나오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100세 시대에 고작 몇년 더 회사를 다닌들 큰 의미가 있을까요? 아마 긴 인생의 이정표를 새로 세우는 것이 훨씬 중요할 겁니다.

격정의 시간이 지나면 현실의 시간이 돌아옵니다. 초면인 사람에게 옛날 명함을 그대로 주거나 아예 줄을 쳐서 건네기도 합니다. 평일 대낮에 동네를 다니기에도 눈치가 보입니다. 도대체 내가 가진 재산으로 얼마 동안 버틸 수 있을까 막연해지기도 합니다. 무심결에 던지는 아내의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가슴에 박히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먼저 퇴직한 친구들과 등산이나 골프를 하고, 아내와 해외여행도 떠납니다. 그러나 차츰 시들해집니다. 아무리 재력이 튼튼해도 돈이 새는 것을 지켜보기는 쉽지 않다고 합니다. 백수가 되면 무엇보다 일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K형에게 퇴직의 아픔을 잘 이겨낸 두 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손성동(52)씨는 손꼽히는 은퇴 전문가로 미래에셋은퇴연구소에서 상무로 근무하다 2015년 말 해고 통보를 받습니다. 승진에서 탈락된 사실은 알았지만 ‘설마’했는데 짐을 싸서 나올 때에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울컥 목이 메는’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유명한 의사가 불치의 암에 걸리는 것처럼 은퇴컨설팅을 하던 그가 졸지에 상처 입은 새가 된 셈이지요.

그는 용기를 냅니다. 막걸리를 식탁에 놓고 가족들에게 담담히 퇴직 사실을 알립니다. 눈물을 머금고 국민연금을 제외한 모든 연금상품을 해약해 빚을 청산했습니다. 조립식 가구로 집에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퇴직한 그날부터 ‘퇴직일기’를 써서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100일간 쓴 ‘좌충우돌’ 백수 경험담은 자신에게 새로운 활력이 되었습니다. 그는 재취업 대신 대학 강의와 함께 한국연금연구소 소장을 맡아 은퇴 대상자를 위한 다양한 활동에 나서고 있습니다. 뜻하지 않은 퇴직이 전화위복이 된 셈이지요. 

LG그룹에서 29년 근무하다 나온 권도원(60)씨는 50대 중반에 회사를 나왔으니 손성동씨보다 훨씬 여건이 나은 편이지요. 그는 현직에 있을 때 경력을 살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강사 겸 경영컨설턴트로 여기저기 밀려오는 강의요청으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퇴직을 앞두고 4년간 꼼꼼하게 준비를 했다는 그는 경영지도사 자격증을 따고 충남 서천군의 전원마을로 귀촌했습니다. 일과 여가의 균형을 위한 선택이었지요. 권씨는 100세 시대인 만큼 60세부터 은퇴를 준비해도 충분하다고 강조합니다. 경력을 살리는 범위 내에서 ‘돈’보다 ‘가치’에 집중하는 일을 찾아내고, 자신이 부족한 부문에 적극 투자해 자격요건을 갖추라고 조언합니다.

K형, 퇴직은 월급통장에 입금이 중단되는 것이고, 아침에 갈 곳이 정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퇴직 이후에도 늦지 않습니다. 남보다 잘할 수 있거나 평생 꼭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볼 절호의 기회입니다. 신神은 모든 사람에게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지요. 앞에 소개한 두 사람이 현직에 있을 때의 경험을 되살려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것을 보면 먼저 자신의 강점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얻을 것인가 대신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퇴직을 두려워합니다. 퇴직은 무덤이 아닙니다. 퇴직은 잠자리에 들어갈 시간이 아니라 깨어날 시간입니다. 마음속에 혼란과 불안을 일으켰던 부정적인 요소를 모두 벗어버리고 평온을 되찾는 시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퇴직은 축복이라고 감히 주장하고 싶습니다.

K형, 제가 몇년 더 살았다고, 퇴직의 아픔을 먼저 겪었다고 외람된 말을 늘어놓았네요. 혜량해주시고, 예전처럼 밝은 표정의 K형을 다시 보기를 기대합니다. 제2의 인생을 위한 장도를 축하합니다.
윤영걸 더스쿠프 편집인 yunyeong0909@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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