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판도라 ❷
그리스신화의 주신主神 제우스는 자신의 명을 어기고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프로메테우스에게 무려 3000년 동안 바위산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끔찍한 형벌을 내린다. 분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프로메테우스로부터 불씨를 덥석 넘겨받은 ‘장물아비’, 인간에게도 형벌을 기획한다.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시켜 여인 판도라를 흙으로 빚어 만든다. 그리고는 아름답지만 교활하고 참을성 없는 판도라의 손에 모든 질병과 불행, 고통이 담긴 상자 하나를 들려 세상에 내려 보낸다. 어리석은 인간은 판도라의 태생과 내면을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부질없는 아름다움에 취해 판도라를 덥석 받고, 판도라는 제우스의 기획대로 호기심에 겨워 재앙의 상자를 열고 만다. 상자 속에 갇혀있던 모든 악과 질병, 고통들이 세상으로 쏟아져 나와 인간들의 끝없는 불행이 시작된다. 제우스의 응징이 완성된 것이다.
제우스의 불을 손에 넣은 인간들은 비로소 문명을 일으키지만 인간들의 문명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낳는다. 욕망을 위해 살인과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다. 감독은 영화 ‘판도라’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위해 원자력이라는 불씨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다보면 신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며, 결국엔 신의 응징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경고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의 대재앙 속에서도 마지막 ‘희망’이 남아있다. 재혁(김남길)을 포함한 ‘무명용사’들이 온몸을 던져 대재앙을 막아선다. 온갖 불행과 고통 속에서도 언제나 마지막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삶을 이어 나간다.
‘판도라 신화’에도 희망은 등장한다. 하지만 상자 속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마지막 남은 ‘희망’을 두고는 여전히 해석이 분분하다. 그토록 철저하게 인간들을 응징하고자 했던 제우스가 ‘판도라의 상자’ 속에 넣어 내려 보냈다는 ‘희망’이라는 것이 과연 인간들을 위한 것인가란 의문이다.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그의 저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Human, All too Human)’에서 제우스가 보낸 ‘희망’이라는 존재에 대해 의심한다. “신은 인간들이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희망에 매달려 죽지 않고 살아남아 계속해서 고통 받기를 원한다.”
불길한 것은 ‘판도라 신화’에서 상자 속에 마지막으로 남아 “나 여기 있다”고 속삭였다는 ‘희망’이 결국엔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제우스가 판도라의 상자 속에 희망도 넣어두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세상에 나오지 못하도록 기획했던 것이다.
허황된 희망은 현재의 고통을 견디게 해주고, 고통과 불행에 대한 분노를 희석시키고, 쉽게 잊게 해준다. 하지만 현실에 분노하지 않거나 분노를 잊는다면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현실과 고통에 제대로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 몇 달 뒤, 혹은 몇 년 뒤 우리는 또다시 ‘판도라의 상자’ 속에서 가냘프게 들려오는 허황된 ‘희망’의 속삭임에 위안 받고 고통과 분노를 잊게 되는 것은 아닐까.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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